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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연 Jun 19. 2024

작지만 큰 마음의 진보

언젠가 큰 울림을 만들어내는 큰 걸음이 되기를

 





내가 그토록 고대했던 뮤지엄 산에서의 경험엔 좋은 경험도 많았지만 조금은 씁쓸한 경험도 있었다.


의도치 않게 함께 제임스터렐관부터 명상관까지 같이 둘러본 외국인 부부가 계셨는데, 주변 경관에 대해서도 굉장한 관심을 보이셨다. 뮤지엄산은 건축뿐만이 아니라 주변 자연과 어우러지도록 조경에도 힘을 썼는데 그 덕에 여러 희귀한 나무들도 볼 수 있고 곳곳에 봄 내음을 맡은 꽃들도 피고 있던 터였다.


제임스터렐관을 둘러보기 전, 도슨트분과 잠시 대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외국인 부부 중 남편으로 보이시는 분께서 이제 막 꽃봉오리를 피우는 매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 이 꽃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너무 아름답네요. "


물론 호주에서 오신 분이기에 영어였다. 도슨트께선 열심히 영어사전을 돌려가며 그 꽃의 이름을 찾으셨고 우리 모녀에게도 그 꽃의 이름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여쭤보셨다. 나와 엄마는 아무래도 '매화'같다며 서로 맞장구치며 그 이름이 맞는 것 같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도슨트께선 '매화'라는 한국이름이 아닌 영어사전에 검색을 거쳐 나온 'Japanese Apricot'으로 그분들께 그 꽃의 이름을 알려드렸다. 그 호주 부부는 고맙다며 미소를 지으셨고 이 꽃이 얼마나 색이 곱고 아름다운지 사진 찍으시며 좋아하셨다.


그렇게 같이 전시를 돌고 명상관에서 명상을 하는 동안 나는 용기를 내어 그분들께 그 꽃의 학명은 그것이지만, 한국엔 한국의 아름다운 고유 명사 '매화'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알려드리지 못했다. 나의 마음 한 구석에서 답답함과 알싸한 감각이 싸르르 퍼졌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명상을 끝으로 각자의 길을 갔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것으로 인연은 끝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뮤지엄산을 떠나는 동안까지도 석연치 않았다. 단순히 알려드리지 못했다는 후회가 아니었다.


앞으로 그분들은 그 꽃을 보거나 목격할 때마다 'Japanese Apricot'을 떠올리게 될 터이다.

비록 한국에서 본 아름다운 꽃과 광경이라 할지라도. 한국에서 경험한 잊지 못할 여행이라 할지라도.

그분들께 그 꽃과 그 풍경 그리고 그 경험은 'Japanese'가 들어갈 터이다.


아. 너무 아쉬웠다. 내가 혹여나 우리나라의 고유명사가 있다고 알려드렸더라면 혹시 'Japanese'보다

'매화'가 더 기억에 남을 수도 있을 거란 나의 믿음이 있었더라면. 막연하게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고유명사를 어려워한다는 그 사실이 걸려서. 사실은 그 말을 하기까지 용기를 내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단순히 귀찮아서. 어쩌면 하루 반나절 밖에 같이 안 볼 사이인데. 이렇게까지 알려드려야 하나라는 나의 안일함도 섞였을 테다.


결국 나는 그 순간의 방황과 불확신으로 그분들에게 어쩌면 한국적인 이름을 알려드릴 수 있었던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계속 영어 학명으로만 언급하던 그 호주 부부와 도슨트의 영어 대화가 아른거렸다. 그리고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아렸다. 가장 눈 부시고 가장 햇살이 좋을 시기에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쓰라림과 싸늘함을 선명히 자각했다.


다음부턴 나의 머릿속에만 남아있던 것들을 끄집어내야지. 그리고 영어로 함축적으로 말하지 말고 풀어서 이야기를 하자. 내가 알고 있다 하여 남들까지 알 것이란 착각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줘야지.


내가 알고 있는 사실, 지식들을 나누고 공유해야지.


영어로든, 어떤 언어든.


나는 그 날 봤던 뮤지엄산의 매화를 매화로 부르고


앞으로도 그 꽃을


매화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매화라는 명사의 아름다움을 알려줄 것이다.


누구에게든.


꽃에 담긴 명사의 아름다움을 모두가 알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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