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라면,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큰 꿈을 가진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보다 강하다.’ -김용삼- # 꿈으로의 길은 고속도로가 아니다. - 쓰디쓴 실패와 좌절은 언제나 꿈의 여정에 함께.
인사동에서 졸업전시회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생각에 잠긴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졸업을 한 학생들은 모두가 느끼는 두려움일 것이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하고.”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 당장 세상에 혼자 던져진 채, 내가 나에게 했던 질문은 하나이다. “너는 그토록 꿈꾸었던 화가의 꿈을 이제 어떻게 헤쳐나가려고 하니”?라고. 고등학교 때는 미대에 가면 다 이루어진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렇듯, 졸업의 의미는 그다음 단계를 의미한다. 바로 그 후가 관건인 것이다.
졸업전시를 마친 후, 어느 날 모르는 누군가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OO대 강의를 나가고 있고, OO전공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작가님의 그림에 관심이 있어서 연락했습니다. 한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당시 내 나이 스물넷. 나는 그저 누군가가 내 그림에 관심을 보인 그 자체가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기에 겁 없이 그분을 만나 뵈었다. 만남은인사동 찻집에서 이루어졌고,자연스럽게 그림에 관한 대화가 오고 가는 동안 그때까지 나는 아무런 이상한 거리낌을 받지 못했다.
그분은 나의 그림을 보고 무척 마음에 와 닿으셨다며 내 스폰서 역할을 해주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말씀이라도 너무나 고마워서 그분의 이야기에 점점 기울였고 이후, 제안주신저녁 식사 자리에 함께하게 되었다. 그분은 그곳에서 술 한잔을 내게 권유하셨지만, 나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잘 모르는 분과 술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그분은 혼자서 내내 술을 드셨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불편한 것을 느끼기 시작하자 그분께 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다음 기약을 말씀드리며 최대한 식사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던지라 조언이 필요했던 나는 학교 선배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이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선배는 내용을 듣자마자 느낌이 이상하니 다음번에 또 약속이 잡히면 다른 작가도 만나 뵙고 싶어 한다고 같이 동석해도 되는지 말을 해보라고 했다. 며칠 후, 그분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나는 선배의 말을 인용하여 좋은 작가분이 있으니 자리를 함께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선배의 직감이 적중한 순간이었다. “나는 작가님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 거지 다른 작가를 내가 왜 같이 만나야 합니까. 저는 작가님과 단 둘이서만 만나고 싶습니다.” 라며 단칼에 거절하였다.
선배는 그 사람이 뭔가 다른 속내가 있는 것 같다며 좋은 사람인 것 같지 않으니 다시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다시 조언을 해주었다. 보통 컬렉터가 다른 작가와 함께 만날 이유를 굳이 거절할 사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후, 나 역시 잘못된 만남이 지속될 것을 우려하여 오는 전화를 더 이상 받지 않았고 내 나름의 이유를 들어 거절하는 문자를 정중하게 보내었다.
그리고 비 내리는 늦은 밤. 내가 알지 못하는 번호로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 몇 번이고 전화벨이 계속 울려댔고 나는 결국 전화를 받았다. “저기요 작가님, 내가 너무 힘들어서 전화했어요, 나 연락할 곳이 없는데 작가님 얼굴만 생각이 나요. 작가님이 나와서 나를 좀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시각은 이미 밤 12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나는 너무나 황당해하며 소리쳤다. “다시는 전화하지 마세요! 안 그러면 신고하겠습니다!” 그때만큼 전시장에 내 연락처가 적혀있던 그림엽서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이 일이 내가 졸업하자마자 겪은 첫 번째 일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겪고 나자 앞으로 누군가가 내 그림에 관심이 있다고 표현을 하였을 때 과연 내가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의 미션을 이제 하나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감마저 더 결여되어, 당장 학교라는 둘레를 벗어나 작가로 가는 길이 정말 어둡고 캄캄하기만 했다. 그러나 주저할 수많은 없었으므로 많은 졸업생들이 그렇듯, 나 또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고 그림과는 무관한 직업에 마구잡이로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곳에서 정말 뼈저린 경험을 했다.
나의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oo일보에 지원을 했다.
세 번의 면접 절차가 통과가 될 때까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냥 회사 이름만을 믿고 면접을 패스하고자 노력을 했다. 나중에 합격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린 후로는 나보다 더욱 좋아하시는 부모님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이 곧 괴로움의 시작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각 칸막이가 쳐진 책상 위로 컴퓨터 하나와 전화기 한 대가 놓여 있는 방에서 모든 직원들은 전화기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바로 텔레마케터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을 접하며 하루하루 지쳐갔고 어릴 때부터 그림만은 포기하지 않고 견뎌왔던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게 꽂혔다. 결국 나는 스트레스로 일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랐다. 부모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지만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고, 그렇게 한 달여만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마지막 퇴근을 하고 집에 도착했을 때 식탁 위에 놓인 케이크를 보자마자 나는 목놓아 울었다. 그러자 말도 없이 다 큰애가 인상 쓰고 울고 있다며 아빠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그렇게 2007년 1월, 내 생일은 더없이 춥디 추운 겨울밤이었다.
2007년 겨울, 춥디 추운 나의 생일.
# 다시 또 도전하다 –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실패와 좌절이 연이어 이어졌지만 나는 다시 일어서야만 했다. 비록 처음 딛는 골목길이 잘못된 길이 었을지라도.
그새, 봄의 기운이 조금씩 움트고 있었다.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이며,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학부 때 경험을 그려보니대학 때 갖은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가장 좋았던 일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만 같았고 그때에 내 모습은 잠시라도 행복했었던 기억의 잔상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유치원에 미술교사로 지원하게 되었고 취직이 되었다.
내가 유아교육학과를 나온 것이 아니었기에 30명이 넘는 7세 반 아이들의 부담임이자 130여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미술교사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너무나 저마다 사랑스러워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미술수업을 하며 본격적으로 내 경험을 만들어 나갔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교사로서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일을 하면서 느꼈던 가장큰 깨달음은 어른이 아이에게 사랑을 주는 것보다, 아이들이 어른에게 주는 사랑이 더욱 크다는 것이었다. 당시 꿈의 길목에서 방황의 기로에 놓여 있던 나는 오히려 아이들로부터 마음의 위로를 받았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도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여전히 해오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 가르치는 일도 일이라며 행사 준비를 해야 하는 날에는 밤 11시까지도 일을 했고, 야간근무와 피로가 누적이 됨에 따라 나는 나의 꿈을 뒷전으로 그렇게 밀어내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자 알 수 없는 목마름이 시작되었다. 전과 달리 이 직업으로 나름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무언가에 갈증이 남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일한다며 미뤄둔 내 작업이었다.
나의 이런 고충을 털어놓자, 한 선배가 내게 제안을 했다.
“그림 그리고 싶으면이 모임 내가 소개해 줄게. 한번 같이 해볼래?”
# 갈증의 우물을 찾아서
홍대 작업실. 매주 목요일. 6시 미팅. 모임 하는 작가들 중, 한 분의 개인 작업실에서 우리는 늘 미팅을 갖었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초 중반의 작가인 멤버들이 모여 직접 전시계획을 짜고 그 계획이 실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양한 의견이 오고 갔으며, 그것들은 정말 허상이 아닌 실제로 이루어졌다. 이 혹독한 미술 세계에서 Young Artist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많지 않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이러한 작가들이 전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작가들이 직접 발 벗고 기획자로 나선 것이었다. 나는 이 모임에 막내 멤버로 참여 함으로써 그 갈증이 서서히 해소되기 시작했다. 목요일만이 기다려졌고, 일이 끝나자마자 설레는 마음을 안고 부리나케 홍대로 달려갔다. 나는 그 모임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기뻤고,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불타올랐다. 몸은 힘들었지만 갈증이 점차 해소되자 생활에 더욱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고정말 열심히 모임에 임했다. 그리고 우리가 계획한 일들이 실행되자 많은 작가들이 전시에 참여를 함께 하게 되었고, 덕분에 나의 전시활동도 다시 시작되었다.
지금의 나는 빙산의 일각일 뿐.
그렇게 활동을 해 나가며 함께 모임을 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새로운 꿈이 생겼다. 바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 선배들은 당시 모두가 대학원생이었다. 학부만 졸업했던 나는 ‘감히 내 주제에’라며 대학원은 사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길이었는데, 이렇게 작가 활동을 하며 학교까지 다니는 그들을 보니 나의 롤모델이 되어 갔다. 그래서 그 해, 유치원 일과 이 모임을 병행하며 대학원을 혼자 조용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면접에 나올 내용을 대비해 책을 읽으며 공부하였고, 학부 때 그린 그림들을 모아 포트폴리오를 스스로 만들었다. 그렇게 다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편입 실패에 대한 쓰라린 경험이 있어서 두렵기도 했지만 나는 다시금 도전을 하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세 학교를 정하였고, 다행히 모든 면접은 토요일에 이루어져서 내가 일하는 곳에 지장을 주지 않고 남몰래 면접을 준비할 수 있었다. 면접장은 가히 거룩하기까지 했다. 나란히 앉아계시는 교수님들이 모두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나는 대학원을 준비할 때에 누구에게도 귀띔하지 않았다. 실패의 가능성을 가늠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주 조용히 준비를 했었다.
결과를 기다리던 어느 날. 합격자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첫 번째 학교에서 이미 패배의 맛을 보았고 다른 두 곳은 경쟁률이 더 높았던 곳이어서 더욱 결과에 대해 미련을 두지 않고 일을 하며 덤덤히 보내던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두 군데의 학교에서 각기 다른 날짜에 합격 소식을 받은 것이다. 특히 마지막 학교는 내가 정말 가고 싶었던 학교 중의 하나였다. 밤 12시 정각, 홀로 손에 땀을 쥐며 모니터 앞에서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열지 말아야 할 비밀의 문을 열 듯이 숨죽이며 합격자 명단을 보았고, 그 밤에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은 채 ‘꺅’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정말 그때만큼 신이 나고 나 스스로가 해냈다는 성취감은 말도 못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의 기쁨에 비해 부모님의 반응은 비례하지 않았다. 가족에게 이야기했다. “나 사실 혼자 대학원 준비했는데, 여기 붙었어” 그러자 싸늘한 말 한마디가 돌아왔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돈은 있니?” 나는 결심했다. 결국 내가 선택한길을 가기로. 그들의 응원이 없어도 나는 나의 길을 가기로 했다. 나는 나의 노력을 배반하고 싶지 않았다. 일하며 그림 그리고 공부했던 내 시간은 누구보다 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돈이었다면 다행히도 1년 동안 일을 하며 모아둔 적금은 내 1학기 학비가 돼주었다. 그리고 나는 당당하게 학교에 등록을 하며 다짐했다. 내가 보여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