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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민 Oct 19. 2020

젊은 그대여, 달리고 버텨라 : 인생의 버팀목은 버티기

내 인생의 명언은 스스로가 만들어 간다.

#늘 두 가지 이상 동시에 함께했던 젊은 날 : 일과 학업을 병행한다는 것.

 나는 늘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겸해서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오전과 오후 아니면 주중과 주말을 나뉘어 서로 다른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생 시절에도 스스로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주중에는 호프 잔 10개를 양손 가득 들고 다니며 밤늦은 새벽녘까지 했다면, 주말에는 예식장 알바 도우미로 2년여간 많은 결혼식을 접하며, 4계절에 하나뿐인 유니폼을 입고 추운 겨울 코트 하나에 달랑 의지한 채 덜덜 떨며 야외에서 예식장을 지키기도 했다.

나의 꽃다운 20대 청춘, 참 많은 일을 했다.
가끔은 주객이 전도되어 학교에 지각을 하기도 일쑤였다. 그만큼 학교 밖의 나의 일상은 오로지 아르바이트였다. 그러나 덕분에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사회생활에 대해서도 참 많이 배웠다. 그리고 그것들은 정말 많은 경험을 안겨다 주었다.
각종 음식점과 호프집, 미술 과외, 유치원*미술학원 강사, 벽화 아르바이트 등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닥치듯이 했다. 그로 인해 나는 대학에서 좋은 학점을 받고 졸업하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2학년 때까지는 내가 선택한 동양화에도 관심이 없었고, 이후에 점차 정을 붙여 그림에 매달렸지만 이미 지나간 학점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덥디더운 한여름이었다.
방학이면 방학에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또 찾아야만 했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일화가 하나 있다.
구직공고 내용을 보아하니 방송에 나왔었고, 여름엔 아이스크림을 팔고 겨울엔 고구마 장사를 하며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학생들을 돕는다는 글이었다. 방송까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은 채 친구에게 이야기를 전했고 서로 용돈을 벌어야 하는 같은 상황에 처했던 나와 친구는 다음 날 겁 없이 찾아갔다.
그곳에 도착하자 나만 한 또래의 여자 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직원으로 보이는 한 아저씨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한 개에 천 원, 하루에 100개 이상을 팔아야 겨우 본전을 찾을까 말까 한 일. 나눔은 5대 5도 아닌 7대 3.
모두가 이때까지는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아이스박스에 너도 나도 아이스크림을 가득 넣기 시작했다. 이후 납치의 한 장면을 보듯, 우리는 서로 영문도 모른 채 봉고차에 올라탔고 목적지도 모른 채로 길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도착지에 다다랐을 때 한 명씩 내려주며 그들이 건넨 말.
“열심히 잘 팔아봐. 다 팔면 연락하고, 또 넣어줄게”

내 차례가 되었다.
역시나 다른 학생들처럼 아이스박스 한 통과 나는 길에 홀로 남겨졌고 그들은 무심하게 유유히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처음 와보는 곳에다 눈앞에 펼쳐진 건 웬 커다란 시장의 간판이었다.
아마 이때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게 모야, 속았나? 그냥 두고 갈까?”
마음속의 갈등이 이내 휘몰아쳤고 어찌할 줄 몰라 잠시 정신을 놓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야 정신을 차려본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주어진 아이스크림을 팔아야만 일당을 받고 집에 갈 수 있었기에.
나는 온 힘을 다해 큰 한숨을 내쉰 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외쳤다.
“아이스케키 팔아요~! 한 개에 천 원~!”
 
그리고 그날 나는 100여 개 정도를 혼자 팔았다.
시간은 이미 해질 녘, 집으로 가는 택시비를 쓰고 남은 돈 몇 천 원만이 내 손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배움은 젊을 때만? 끝이 없는 배움의 길 : 학업의 도전에 나이는 사치.

 대학원 면접 때의 일이다.
세 분의 교수님 중 어디서 많이 뵈었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이내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가 다니던 대학 시절, 출강을 나오셔서 가르쳐 주시던 교수님이 면접장에 심사위원으로 앉아계셨다.
같은 학교로 대학원을 시험 친 게 아니었기에 매우 뜻밖이었고 내심 반갑기도 했으나 교수님은 나를 알아보실 리가 전혀 만무했다.
그 후, 입학해서 교수님을 만나 뵈어 이 이야기를 드렸을 때 역시나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랬어? 네가 내 수업을 들었어 학부 때?”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신기한 인연이라고 짧게나마 생각했던 내 모습이 참으로 무색해지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원 생활.
대학원을 들어가서도 일은 멈춰지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며 여전히 내 용돈을 벌어야 했으므로 계획하에 야간 대학원을 지망했다.
그리하여 오전 8시부터 4시까지 평일에는 유치원 미술교사 일을 시작했고, 일을 끝마치면 학교로 건너가 6시부터 10시까지는 주 3일로 수업을 받았다. 나의 하루 일과는 늘 10시가 되어야 끝이 났고 11시가 넘어가는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매일매일의 같은 하루가 반복되자 나는 서서히 지쳐갔다.
당시 1년은 매우 힘든 한 해였다.
꿈을 위해서 내가 원하는 학교에, 원하는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대학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전문 이론과 수업들이 내 숨을 턱턱 막히게 했고, 늘 나의 그림은 교수님께 꾸짖음의 대상이었다.
 
호되게 혼나고 못났다고 이야기를 들어도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떻게 들어온 학교인데 하며, 허벅지를 쿡쿡 찔러가며 때로는 강의실 맨 뒤에서 숨을 죽여가며 눈물짓기도 했다.
이에 나는 재능이 없다고 속앓이를 했다.
어떤 때는 차라리 단도직입적으로 누군가 말해주길 바랐다.
‘너는 재능이 없으니, 작가의 길을 포기하라며’
 
그렇게 나와의 싸움을 거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단하게 일했고, 고단하게 공부했으며 지칠 때로 지쳐갈 때쯤이었다.
힘든 과정이 있을 줄은 예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자신감을 잃어갔다.
과연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 들었을 때.
그들이 있었다. 나보다 훨씬 연배가 많으신 분들.
그분들 중 이미 작가 활동을 하고 계시면서 본인의 스펙을 한층 더 쌓기 위해 혹은, 못다 한 공부를 더 하고 싶으셔서 다시 도전하여 들어오신 분들이 나와한 강의실에 앉아서 수업을 받으셨다.
그분들의 학업 도전기는 나이마저 잊게 했다. 나는 당시 막내로 가장 어렸으며, 20대는 온전히 ‘나’ 하나뿐이었다. 대부분 40대에서 50대 연령의 분들이 나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공부를 하고 계셨고, 수업시간에도 열의를 다해 교수님께 질문하시며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도 매우 애착을 가지고 계시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그중 한 분은 내가 정말 존경했던 분으로 40대 늦깎이라는 말은 물거품이라는 것을 증명하시듯 열정을 다 바쳐서 학업에 매진하셨고 지금은 여기저기서 오히려 콜을 받는 작가로 여전히 최선을 다해 작업을 하시며 교수님까지 되신 분이 계신다.
대학원 생활 때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그분이 늘 하신 말씀이 있다.
“너는 언니처럼 돌볼 애가 있니, 시댁이 있니. 너는 지금 너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삶인데. 언니가 너였다면 잠도 안 자고 실컷 그림 그리고 공부하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을 거야.
 
그렇다.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그 시간에 나는 흐트러져 버리고 말았다.
지금 당장 힘들어도 이 길을 선택한 것은 본인이며, 이 길까지 어떻게 도달한 나인데 절대 포기하기에는 일렀다. 꿈의 과정으로 가는 길이 방황의 연속일지라도 나는 버텨야 했다. 지금이라도 공부할 수 있고 학교에 다닐 수 있어서 좋다고 말씀하시는 그분들을 보며, 힘들어만 했던 나는 참 바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내 청춘은 달려야만 했다.
비록 내 에너지가 다 소모되더라도 그게 내 꿈으로 가는 길의 과정이라면.
내게 넘지 못할 산은 없다고 다시 다짐해야 했다.
 
 

#그래도 버텨라. 달리고 버티는 자에게 다시 햇빛이 드리울 것이다.
 
그렇다. 버텨야만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듯이 버텨야만 했다 나는.
갈림길에 서 있다면 나는 버팀 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러나 내 마음과 달리 겨우 다짐을 하고 있을 때, 사고가 났다. 그것도 전시를 5일 앞두고 다리가 부러졌다.
아이들을 가르친 후, 학교를 가고자 버스를 타러 다급히 내리막길을 내려오던 중 발이 삐끗했고 그대로 주저앉아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전시를 코 앞에 두고 일어난 일이라 나는 더욱 정신이 혼미했다. 게다가 한 작품만 걸리는 전시가 아니라 개인 부스 전이어서 자신의 부스 안에 5-6점의 그림을 걸어야만 했는데,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진행 중인 상태였다.
그렇게 설레며 기다리고 기다렸던 내 생애 첫 개인전이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깁스 한 다리 한쪽을 붙잡고 이미 모든 것을 망친 듯 서글피 울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결코 시간은 아픈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나는 코앞에 전시를 앞두고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다음 날, 목발에 의지한 채 급히 작업실을 향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2박 3일.
외부와 단절된 채로 공동 작업실에서 숙식하며 온전히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밤새 작업을 이어나갔다.
 

2박 3일 밤새며 그렸던 마지막 작품 2008.


그렇게 전시 날이 다가왔다.
완성된 마지막 그림과 함께 여러 점의 그림을 걸었고, 불편한 다리이지만 내 몸을 이끌어 매일매일 전시장을 향했다.
다친 다리를 시작으로 다사다난했던 전시는 결국 시작되었고, 전시하는 일주일의 여정 동안 아픔을 잊게 했던 몇몇 에피소드들도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각 부스마다 돌아보시며 전시 관람을 하시던 생활 한복 차림의 남자 관람객 한 분이 계셨다.
그분은 내 그림들을 둘러보시곤, 깁스를 한 내 모습을 한번 위아래로 보시더니 내게 그림에 대해 몇 마디 물으시고 한마디 말씀을 남긴 채 사라지셨다.
”마음의 무늬를 그리는 그림이라.... 그림에 작가의 한이 많이 서려있네요 “
내 인생을 압축해 말해주는 한마디 같았다. 그 후, 그 말씀은 오래도록 가슴 한켠에 남았다.
 
그리고 정말 내 눈물을 펑펑 쏟게 했던 따듯한 메시지들.
힘들게 버텨왔던 여정이 대수롭지 않을 만큼 느껴진 것은 나의 작품들을 보고 작성한 그들의 방명록이었다. 그중 내 전시를 처음으로 본 엄마의 메시지를 보고 나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표현을 못하는 엄마의 첫 마음 메세지.


모든 힘듦이 사라지던 순간이었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해낼 수 있다며 대학원을 강행했고,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그림까지 그려야 했던 모든 애처롭던 시간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렇게 나 자신을 원망했던 다친 내 다리마저 전혀 개의치 않았을 정도로.
그렇게 버텼다. 달려온 시간은 결국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고 다시금 느꼈다. 힘들었던 시간만큼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결코 멈추지 않고 잘 달려왔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리고 귓가에 들려오는 내 마음의 소리가 내게 이야기를 건넸다.
‘힘들었어도 참 잘 버텼다고. 여기까지 오느라 참 수고 많았다고. 잘했다, 진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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