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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민 Oct 28. 2020

상처는 인생의 단면

사춘기를 제대로 보내지 못한 오춘기 어른 ‘어른아이’


#모두가 삶의 지게를 각자 지고 있다.

살면서 내가 가고자 하는 길로 가기 위해 한 길만을 주욱 걸어오진 못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갈림길에 서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시간들이 더 많았다.
그것은 나이가 점차 들어감에 따라 더해졌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선택한 일에 있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 꿈을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을 책임 져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선택에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알려준다.

우리는 인생에서 참으로 많은 조언을 듣는다.
그 조언이 때론 내게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주기도, 때로는 피하고 싶어지는 이야기 들일지 모른다.
피하고 싶은 조언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반대의 이야기를 들었을 경우이다.
그러나 결국 선택의 길은 본인이 결정해야만 한다. 내 인생의 몫은 스스로 지고 있으므로.


늘 우리는 자신이 가진 삶의 지게를 얹혀 놓고 산다.
때로는 일어설 수 없을만큼 그 지게에 너무 많은 것이 얹혀서 감당하지 못해 주저 앉아버릴때가 있다. 그러나 삶은 매 순간 우리가 지닐 무게를 늘 숙제처럼 주곤한다.
나 또한 그 지게에 눌려 일어 설수 없는 순간들이 매번 찾아왔고, 정말 그때엔 어쩌지 못해 주저 앉아버렸다.
내가 선택한 학교를 두고 결국 나는 1년만에 휴학길에 올랐다. 문제는 돈이었다. 일과 학업을 열심히 병행 했지만, 용돈과 생활비 정도의 월급은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기엔 턱 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집에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가 선택한 길이었기에.
20대 미숙한 어른이었지만 내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나의 선택에는 그만큼 감당해야할 무게가 버젓이 떨어졌다.

휴학길에 오르자마자 벽화회사에 취직을 했다.
인테리어 쪽에도 관심이 있던 나는 이전부터 해보고 싶던 일이었기에 직업에 대한 만족감을 되찾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임했다
일이 시작되자 대부분 작업을 함께하는 직원과 외부에서 시간을 보내기가 일수였기에 집에는 거의 들어 갈 날이 없었다.
해가 뜨자마자 붓을 들었고 새벽녘 캄캄한 밤이 되고 나서야 나 또한 붓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매일매일이 지나갔다.
대학때부터 입고 다니던 깔깔이에는 늘 페인트와 아크릴 물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손에서는 각종 물감 냄새가 떠나질 않았다. 지워지지 않는 유성 물감은 신나로 손을 박박 씻어내야 겨우 지워질까 했다. 그럼 어느새 피가 나고 갈라지는 내 손을 볼 수 있었다.
병원, 새 주택단지, 까페, 웨딩 스튜디오, 펜션 등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일을 했다.
그렇게 나는 내 작업에서 손을 떼고 일에 몰두하며 벽화를 그리던 찰나였다. 어느날, 대학원 동기 선배분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진아야, 너는 작가가 될 사람이라는 걸 잊지마. 벽화쟁이가 아니야”
그 한마디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구미 전원주택 벽화, 밤낮 없이  그림만 그렸던 그 해 2009년.



#맞딱드리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너에게 찾아올 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행위자체로 만족을 했던 터였다.
나에게 현실적인 문제가 다가왔기 때문에 그 갈림길에서 조금의 쉼도 필요했고 돈도 필요했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길에 책임을 지려면 나는 다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한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럼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나는 어디인가.
일주일에 한번 들어갈 뻔한 집은, 내 안식처가 아니였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나는 울분이 치솟았다.
이내 돌아보니 행위를 하고 있기에 안도하고 있었다. 붓을 손에 놓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미 늦었고 내겐 돈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나는 버텨야만 했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뒤통수를 맞은것이다.
사장이 월급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월급은 점차 밀리기 시작했고 내가 받아야 할 지분을 제대로 받지 못한채 일만 하고 있었다. 이후, 터질게 터졌다. 믿었던 그의 거짓말이.
사태가 일어난 후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같이 동거동락하며 작업을 같이 했던 동료들과 그렇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그렇다. 나는 또 다시 길 고양이가 되었다.

청춘은 길 고양이 같다.
어떤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그 인생의 미로의 길 위에서 우리는 정처를 잃고 한참을 헤멘다.
내가 짊어질 수 있다며 당당하게 말하던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좌표를 알려주지 않았다.
학교를 나오자 다시 세상과 혼자 맞서싸워야 했다.
그 길에서 누구도 나를 건져 내어 줄수 없었다. 오직 본인이 해결해야만 했다.
짊어멘 짐은 내 어깨를 점점 더 짓눌렀다.
다 내려놓고 싶었다.
돈도, 학교도, 연애도, 청춘도 다 싫었다.

한 달여간의 시간이 흐른 후, 놓아버린 나를 다시 일으켜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일을 찾았다. 내가 참 잘하는 아이들 가르치는 일. 아이들이 상상하고 직접 쓰고 그린 그림들이 실제 동화책으로 만들어지는 프로그램으로 그 당시, 기존 미술학원과는 다른 색다른 경험이었다.
벽화와는 또 다른 일이었지만, 나는 다시 안정감을 찾고 새로운 일자리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그림이 되고, 그 과정을 함께 모색하며 찾아가는 일이 참으로 나에게도 성취감을 맛보게 했고, 아이들 그림을 보며 나 또한 작게 동화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당시 대학원을 휴학하면서 월세를 내며 다녔던 작업실과는 안녕을 고했기에, 집에서 작업을 할 만한 공간을 마련하지는 못했던 터였다.
그래서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때에 나도 함께 내 그림을 작업해 나갔고, 아이들은 선생님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너무나 좋아하기도 하고, 선생님의 이야기는 무엇인지 묻기도 했다.
그렇게 일상이 흐르고 있을 때였다.

햇볕 따스했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점심시간, 둘째에게서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언니, ㅇㅇ오빠가 죽었대”
동생의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눈 앞이 그야말로 캄캄해 졌다. 당연히 일이 손에 잡힐리 없었다.
당시 자전거를 타고 3-40여분을 출 퇴근을 하고 다니던 나는, 그날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눈물에 범벅된 얼굴로 앞만 보며 달렸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달리다가 당장 사고가 난다해도 당연할 정도였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했고, 믿고 싶지 않았던 친척동생의 영정사진이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정확히 한달 뒤, 친척언니가 죽었다는 소식이 다시 귓가에 들렸다.
그해, 2010년 여름이었다.


#상처투성이 헤쳐나가기

시간은 아무일 없듯 지나간다.
시간은 흐름을 가지고 있는 오묘한 세계이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흐름속에 인간의 인생을 좌지우지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속에서 많은 것들을 겪으며 변화속에 성장해 나간다.
그러나 그 시간이 못내 해결해 주지 못할때도 있었다.
절망과 상처는 곪고 골아서 온몸에 독이 퍼질대로 퍼졌다. 그때에 나는 어떤 것에도 미련이 없을 정도로 살아갈 이유를 잃었었다.

연속된 사건 이후로 방황을 멈추지 못했다.
첫사랑과 헤어졌을 때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는데, 이건 다른 문제였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에서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공간, 새로운 것들이 절실히 필요했다.
부모님과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살기 위해 새로운 공간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아닌 곳, 그 어딘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새로운 공간을 찾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목적지는 바로 정해졌고, 도움을 받아 바로 비자 신청을 했다.
그렇게 비자를 준비하고 기다릴때쯤 뜻밖의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전시소식이었다. 내 작품을 보고 연락이 온 갤러리와, 아이들을 가르칠 당시 그림을 그렸던 동화그림까지 모두 전시할 기회가 온 것이다.
참 신기했다.
내 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결국 그림뿐이었고, 나를 지탱해준 것 역시 그림이었다.
그 누구도 아니었다. 바로 그림.
그렇게 떠나기 전, 마지막 전시를 준비했다.
마지막 전시의 작품은 나의 내면의 이야기 중 상처에 관한 일렁임을 다룬 그림이다.
내 그림의 모티브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현상들을 가시화하는 것인데 이 작품은 상처 받았을 때의 마음속을 그려나간 것이다.
어디서부터 흐르는지 모를 위액이 쏟아져 내리고 내려 온 몸에 독이 퍼진듯한 느낌을 담고 싶었고, 이 작품은 먼길에 오르기 전 마지막 전시 작품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상처받은 내 마음을 세상에 내 보인 후, 비행기에 올랐다.
한번도 겪어 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2010년 마지막 작품, 뒤엉킨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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