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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민 Dec 14. 2020

나의 한계는 규정되지 않는다

점점 더 넓은 세상으로 뛰어들다 (호주 이야기 1)

#미련 없이 떠나라, 숨 쉴 시간이 필요할 때.



한국에서 준비 한 시간은 한 달 남짓.

비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2주 만에 빠르게 승낙이 되었다.

당시 나는 몇 년의 만남을 이어오던 연인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장은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만 같았다.

떠날 것이라는 내 말을 믿지 않았던 연인이 내가 비자 발급을 받고 한국에서 진행하고 있던 삶을 조금씩 정리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자 그는 그제야 내게 이야기했다.

“진짜 가는 거야? 정말로? 안 가면 안 돼?”

그러나 이미 나를 붙잡기엔 그의 말은 너무도 늦었으리라.

나는 이미 결심을 하고 진행 중이었으며, 나를 붙잡기엔 그는 내게 숨 쉴 공간을 전혀 내어 주지 못했다.

그랬기에 연인의 말은 참 무색하게 들렸고, 나는 개의치 않고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준비 과정에서 보낼 수 있는 모든 짐은 미리 정리하여 부치고, 혹시 몰라 그림과 물감을 챙겨 박스에 같이 담았다.

그렇게 모든 채비를 마치고 마침내 집 앞에서 엄마와 마지막으로 마주했다.

엄마는 당장 가서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서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와라, 돌아올 집이 있으니까”


그렇게 공항으로 떠나는 길.

나는 연인과 동행했다.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택시 안,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는 종이에 계속 글을 쓰고 있었고, 나는 여러 가지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웃돌아 창밖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끝내 작별의 시간은 순식간에 덮쳐왔다.

"나 이제 갈게, 잘 지내. 연락할게."


고개를 들자 그제야 참고 있던 감정을 터뜨린 그의 모습을 마주했다.

눈물로 범벅된 그의 얼굴을 보자, 그때서야 나는 내가 떠난다는 사실을 인지했고 연인의 얼굴을 보며 미안함과 함께 끝내 눈물이 솟구쳤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도래했다.

나는 떠나야만 했다.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나의 어른 아이를 찾아서.



#인생이 고되었을 때 : 낯선 땅을 밟다.


내가 도착한 곳은 호주라는 낯선 땅이었다.

그것도 살면서 처음으로 들어본 케언즈 Cairns.

케언즈는 호주 퀸즐랜드주의 북동쪽, 해안 저지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신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로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그린아일랜드를 껴안은 곳이다.

지금도 눈에 아릴 만큼 참 아름다운 도시다.


해외여행이라고는 살면서 처음이었고,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1년의 시간을 잘 보내야 했기 때문에 많은 고민들이 연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온몸을 압도하는 자연과 마주하자 복잡한 생각은 온데간데 사라졌다.

그렇다. 나는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하여 온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대책 없이 무작정 떠나왔기에 정작 호주 생활이 시작되자 문제에 바로 직면했다.

그것은 바로 의사소통인 영어였다.


케언즈 라군


나는 초기 정착을 위해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부부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호주에 정착하기 위해서 열심히 고군분투하면서 살아가던 중으로, 나의 호주 생활은 그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말 그대로 영어를 전혀 준비하지 못한 채 떠나왔다.

사실 떠나올 당시 나는 그런 것들을 전혀 생각할 여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살아야만 했고 돌팔구를 찾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당연히 내 영어실력은 밑바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나를 보며 그들은 내게 제안을 했다.

영어일기를 매일 써보는 것과 기초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니 학교를 등록하여 다니는 것.


그렇게 나의 3개월 어학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도대체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영어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싶었다.

기초가 없으니 당연히 레벨 테스트는 잘 볼일이 없었고, 그로 인해 elementary class로 배정을 받았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내가 영어가 무슨 필요가 있어? 일하고 그림만 열심히 그리면 되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무척 안일했던 나를 돌아보게 했고, 모든 것은 후회로 다가왔다.


당시, 내 기준에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가 영어를 매우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내게 뜻밖의 사단이 났다.

반이 지정된 후 교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온통 나와 비슷한 아시아 친구들이나 한국인 친구들이겠지 라고 단언한 내 생각은 무척 큰 오산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건 과반수가 서양인으로 보이는 친구들이었다.

반 안의 국적은 모두가 다양했고 나는 그대로 얼음이 된 채로 멈춰 있었다.

그러자 머릿속에 무수히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이제 어떻게 하지, 나한테 말이라도 걸면 어쩌지?”

심장 박동이 멈추질 않았고 손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그렇다. 이제 진짜 정면으로 부딪힐 시간이 온 것이었다.

더 이상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미지의 세계에 그야말로 제대로 입성을 한 것이었다.



#미지의 세계에서 새로운 시작.


‘Jina, Do you have time tonight?’

어학원 생활에 점점 적응을 해 나가고 있을 때쯤, 스위스 국적인 같은 반 친구 미카엘라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대략 들어보니 오늘 밤 시간이 되냐며 함께 클럽에 가자고 이야기를 했다.

같은 반에서 공부를 하는 친구들은 러시아, 스위스, 대만, 일본, 프랑스 등을 포함해 여러 친구들이 있었고 모든 외국인은 영어를 잘할 것이라는 나의 편견을 완전히 깨 놓았다.

그중 미카엘라의 경우 유독 내게 친근하게 관심을 표하며 늘 내 옆에 앉아서 수업을 같이 듣고, 먼저 이야기를 걸어오는 친구였다.

당시 자신이 없던 나는 반에서도 특히 서양인으로 보이는 친구들에게 유독 다가가지 못했는데, 그녀는 먼저 나에게 손짓을 내밀어준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너무 고마워서 어쩔 줄 몰랐다.

그녀가 말을 걸며 내게 다가올 때는 먼저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자 애를 썼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손, 발 몸짓을 다 사용해가며 이야기를 어떻게든 이어나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더욱 고마운 사실은 그녀 역시 같이 이야기를 하고자 노력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친구란 그런 것 같다. 모든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 이미 마음으로 서로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후로 우리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그녀의 또 다른 스위스 친구와 함께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었고 언어 레벨이 다른 반 친구들도 점차 알게 되고 친해지면서 나는 여러 가지 신나는 경험들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학교를 다닐 때 늘 수영복을 속옷처럼 안에 입고 다녔다.

날씨가 매우 더운 케언즈는 그야말로 한 여름이었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라군 Lagoon이라는 곳을 달려갔다.

라군은 케언즈 도시 한복판에 있는 대형 수영장으로 모두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늘 바로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너나 할 것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으며, 수영을 한참 즐긴 후에는 발리볼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낸 후, 즐거운 바비큐 파티가 매일같이 이어졌다.

오후 해 질 무렵쯤엔 잔디에 누워 박쥐 떼들이 새까맣게 지나가는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가지도 않던 클럽을 학교 친구들과 다니며 우리만의 신나는 밤을 보내었다.

그렇게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 내게 펼쳐지고 있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빛은 매일같이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늘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자연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전혀 없었다.

내가 느끼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본능적인 움직임을 따라 그렇게 3개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의 문제는 점점 더 인식되어 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어였다.

어울리고 놀면서 배우는 영어야말로 최상의 공부 방법이었지만,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을 쓰며 내 의사를 전달하려면 무언가가 더 필요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심각성을 깨닫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영어는 그들과 어울리며 좀 더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당연히 해야만 하는 내 첫 번째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한순간에 영어를 잘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듣는 연습부터 시작을 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오간 말을 기억해 두고 노트에 적어 놓았다가 집에 와서 사전과 책을 찾으며 그 이야기들이 무엇이었는지 확인을 했고, 이후는 다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나도 같은 표현을 재사용하며 반복을 했다.

또한 매일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미리 공부해 두고 학교에 가서 그 표현을 사용해 보기도 했다.

그러자 점차 친구들의 이야기가 전보다 더욱 뚜렷하게 한 단어씩 들리기 시작하는 놀라운 일이 펼쳐졌고, 나는 점점 더 도전하고자 노력했으며 서서히 자신감을 조금씩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서히 조금씩 놀라운 일이 생겼다.

영어란 내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는데 불구하고 내가 영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배운 깨달음은 언어는 공부도, 학습도 아니었다. 결국 언어는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연결고리이므로 듣고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늘 책 몇 페이지를 펴놓고 줄을 그어가며 암기를 하는 공부였다면, 영어는 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직접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곳에서 비로소 느꼈다.

그렇기에 환경도 매우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적절한 환경이 자신에게 주어졌을 때 그곳에서 자신을 던져놓고 싸워 봐야지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점차 여러 나라 친구들과 지내면서 이전까진 경험하지 못한 인생의 새로운 항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다시 웃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온 한국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나의 연인조차. 나의 아픔조차. 그 모든 것들에서 나는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시간들을 그냥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늘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나에게 선물을 주듯 남은 20대의 여정을 온 힘을 다해 쏟아부었다. 이곳 호주에서.



#무지한 용기로 시작된 도전과 깨달음.


어느 날이었다.

케언즈 거리를 거닐던 중, 도시 한복판에 있는 갤러리에 방문하게 되었다.

케언즈에도 크고 작은 갤러리들이 많았는데, 내가 그곳에서 접한 놀라운 작품은 바로 호주 원주민의 그림이었다.

‘에버리진인’이라고 불리는 호주 원주민은 말 그대로 호주 토착 원어민들이다.

사실 케언즈에서 그들을 마주칠 때는 친근감보다 공포감이 앞섰다.

그들은 늘 술과 마약에 찌들어 있었고, 아시아 학생들이 지나갈 때는 말을 걸며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호주는 대형마트로 유명한 콜스와 울월스가 있다.

마트에서 장을 보며 마주친 그들은 대게 아이들이 많았고, 늘 큰 목소리와 함께 맨발로 마트를 돌아다니며 장을 한가득 보는 모습들을 빈번찮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위험한 상황들의 이야기가 늘 즐비하여 학생들 대부분은 기피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생각을 바로 뒤엎은 것은 다름 아닌 갤러리에서 마주한 그들의 작품이었다.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나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호주 그대로의 자연을 느끼는 대로 표현한 그들의 손길과 색감, 표현력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가히 대단한 예술 작품이었다.

이후, 나는 그 작품들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내내 떠나질 않았고 마침 혹시 몰라 챙겨 왔던 나의 포트폴리오가 떠올랐다.

그러나 작업을 바로 할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나는 방향을 전환해 다시 생각을 했다.

‘타투샵을 도전해 보자’



호주 원주민의 작품



케언즈에서 놀라웠던 또 다른 사실은 길거리를 맨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흔치 않게 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고, 비가 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여자·남자, 젊은이와 할머니·할아버지 할 것 없이 그들의 몸에 새겨진 각양각색의 문신들.

바로 타투 Tatoo 였다.

그러고 보니 도시 주변 곳곳에 타투숍이 즐비해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내가 하고자 하는 말 몇 문장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 겁 없이 돌진했다.


“Hello, My name is Jina, Do you have time for me??


If you have time, I want to show you my pictures. I’d like to learn tatoo here.”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그분이 기가 찼을까 한다.

영어도 몇 마디 못하는 아시아 소녀가 뜬금없이 포트폴리오를 들고 찾아와 자기에게 대뜸 보여주겠다니.

나는 두렵기도 했지만 실행하고자 한 마음을 그치지 않았고, 몇 군데를 더 들러 연습한 영어를 반복해서 말하며 포트폴리오를 그들에게 내밀었다.


참 고마웠던 것이 하나 있다.

나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하고 있는 와중에도 짬을 내어 하나같이 내 그림을 봐주었다.

그리고 연신 “gorgeous”, “lovely”, “beautiful”이라는 말을 하며 그림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었다.

온몸에 타투를 하고 있던 남자분이었는데, 그분은 내 포트폴리오를 자세히 보시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다.


“네 그림은 참 좋아, 나는 마음에 들어. 나는 네 용기에 박수쳐주고 싶어. 그런데 이 그림들은 이곳 타투숍 보다는 갤러리에 더욱 어울릴 것 같아. 내가 아는 갤러리를 추천해 줄게, 그곳으로 가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건 어때?”


맞다. 그의 말은 정확했다.

나는 실패했다는 생각도, 아쉽지도 않았다. 내가 이 낯선 땅에서 도전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내 자신이 경의로웠고 그로 인해 자신감을 찾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나는 다시 한번 당찬 걸음으로 그의 조언을 받들어 성큼성큼 한 갤러리를 향해 다가갔다.


갤러리를 방문하자 한 큐레이터가 갤러리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매우 상냥하게 내게 다가왔고 나는 준비한 그림을 보여드렸다. 그러자 내 그림을 하나씩 천천히 주의 깊게 보시던 중 하나를 픽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이 그림이 좋아, 네가 이 그림과 비슷한 분위기로 그림을 그려온다면 내가 너에게 전시 기회를 줄게”


갤러리에서 나서자마자 나는 기쁨의 포효를 멈출 수 없었다.

말 그대로 awesome이었다.



그녀가 마음에 들어했던 그림 중 하나



내 자신이 이때만큼 뿌듯했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방으로 들어와 정지한 채 물감들을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기쁨의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무렵, 3개월의 어학원 생활은 끝나 가고 있었고 빈 주머니는 그야말로 알람을 울려댔다.

눈앞이 캄캄했다. 머릿속엔 온통 다시 살길을 찾아야 하는 생각뿐이었다.

내 꿈을 무작정 쫓아가기엔 빈털터리가 되어가는 내 모습이 자각이 되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이 호주에서의 전시 꿈은 무산이 되었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현실에 맞서 호주에서도 버티기가 시작되었다.


(다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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