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에 반하여

수전 손택의 '봉사하는 비평'

by 백설

평가는...


사실 평가라는 건 평가를 받는 이들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평가하는 위치에 선 이들은 권력적이고 고압적이다.


평가는... 수전 손택이 말한 대로, 평가자들의 권력이 아니어야 한다.

평가대상(이라는 말도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음)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위한다'는 것에 대한 수많은 갈래들을 생각해 보면,

평가받는 이들을 위한다는 것은 왜곡 없이 친절이든 가혹함이든을 벗겨버린 1mm의 성장이라도 이룰 수 있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쉽지 않다.


평가자들은 '자기 기준'을 내세우며 평가하기 때문이다.

지나친 자기 기준에 근거하는 평가는 일단 전혀 온화하지 않다. 평가가 반드시 온화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온화하지 않아도 됨을 전제하고 말을 하자면,

냉철한 평가라는 것이 반드시 평가받는 이들을 상처 입혀야 할 정도로 혹독! 해야 하고 냉정!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냉철함이라는 것은 사디즘이 아니다.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이들이 정말 많은 대한민국은 아직 선진국이 아니다 ㅎㅎ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평가란, 봉사에 가깝다.

수전 손택의 정의가 맞다. 평가는 봉사에 가깝다.


나의 에너지와 사고력, 지혜와 철학, 경험을 잔뜩 버무려 어떻게든 평가받는 이들이 1mm라도 성장을 이룰 수 있게끔 지침을 주는 것이다. 물론 거절당할 위험과, 그 평가를 쓰레기통에 쑤셔박으며 반박당할 모멸감도 감수해야 한다.


평가란 평가자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평가에 대해 평가를 받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고압적인 자세로, 잔뜩 생색내며 내가 낸데~ 하면서 봉사를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봉사란, 서비스 제공과는 또 다르다. 서비스는 철저히 사용자의 편의를 위한 매뉴얼이다. 봉사는, 편의를 떠나 매우 실용적이고 필수 불가결한 요소를 성립시키기 위해 기꺼이 그 대상의 필수 권리 보장을 위해 스스로를 할애하는 작업이다.


그 두 가지는 정말 다른 것인데, 이것을 구분하는 이들도 거의 없다.


즉, 평가라는 봉사는 대체 왜 봉사인가. 어차피 서비스가 될 수는 없는 특질을 지니고 있으니, 대체 왜 봉사인가를 생각해 보면,


인간이 평가자와 멘토를 찾는 이유는 그 평가자와 멘토를 섬기고 모시기 위함이 아니라 필수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평가자와 멘토라는 이름이 붙었는가 하면, 성장을 대신해줄 수 없고, 서비스처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생님이라는 것은 먼저 앞서간 사람으로서 기능하는 것이지, 다시 퇴행하여 후학들과 같은 레벨이 되어 '진짜 성장'을 해나갈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선생님에게 서비스를 요구하거나, 혹은 지나친 선망과 섬김의 대상으로 삼는 대한민국은 자유롭게 평가의 봉사를 받을 준비가 안 됐다는 얘기다.


봉사정신을 가진 사람을 쉽게 얕보고 멸시하며 발 밑에 두려고 하는 이들은 본인을 위한 평가에는 관심이 없다.


눈앞의 평가자가 무슨 자격이 있는지.

내가 섬길만한 자인지.

혹은 내가 마구 부리며 서비스를 요구할만한 자인지.


그것밖에 관심이 없다. 이렇게 스스로에 대한 필수에는 무관심하고 서비스 채널만 켜놓으니,

평가하는 위치에 선 자들은 괜한 권력에 취해야만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진정 봉사하는 마음을 가진, 나의 필수 성장을 조력해 줄 평가자와 멘토를 찾는다면

그 멘토의 자질 역시 중요하겠지만, 본인이 무엇을 오해하고 있고 무엇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지 생각해 봄이 좋다.


그리고 꽤나 고압적인 평가자의 위치에 서있는 사람들 역시 뭐가 그토록 본인을 그런 껍데기 위에 올라서게 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런 위세는 매우 불필요한 것이다. 자기 방어에는 어느 정도 도움은 되겠지만, 그뿐이다.


대단한 성장은, 대단한 사람을 그저 옆에 두기만 하고 관조하기만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장은 서비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