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그림자에 쫓겨 지하철역까지 달려온 호달은 다리에 힘이 풀려 한동안 승강장에 앉아있었다. 그러곤 열차에 오르자마자 혼곤한 잠에 빠졌다. 새벽부터 잠을 설친 데다 예기치 않게 긴장한 탓이었다. 무겁게 떨어진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 느꼈지만 좀체 잠을 떨칠 수 없었다. 그바람에 환승역을 놓칠 뻔하다 겨우 2호선으로 갈아탔다. 맞은편에 한 남자가 자리를 잡았다. 남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종이 한 장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호달도 눈을 감고 다시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차역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든 호달의 눈에 여전히 종이를 든 채 눈을 감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뭐지?’
그제야 남자가 든 종이에 관심이 갔다. 종이에는 볼펜으로 진하게 글씨가 쓰여 있었다.
벤 존슨, 9.79는 또 뭐야?
맥락 없는 문구에 호기심이 일어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마가 조금 벗어지고 마른 체형의 평범한 중년이었다. 검고 헐렁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종이를 든 손목이 유난히 가냘파 보였다.
새로 열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은 남자를 한번 힐끗 쳐다볼 뿐 이내 휴대폰 속 자신의 세계로 뿔뿔이 흩어졌다. 호달 역시 할 일이 있었으므로 곧 시선을 거두고 휴대폰을 켰다.
은행 입금 내역을 확인하고 피시방 매니저의 전화번호를 노려보다 연락할 만한 친구 목록을 뒤졌다. 죄다 고만고만한 사정에, 막상 돈 얘기를 꺼내자니 서로 간의 친분을 따져보게 되는 애매한 이름들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맞은편 남자의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호달은 휴대폰 속 친구 목록을 훑으며 언뜻언뜻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의 태연한 표정이 왠지 신경쓰였기 때문이다. 가벼운 종이 한 장이지만 꼼짝 않고 들고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오기부리듯 계속하는 이유가 뭘까. 호기심과 궁금증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불편하고 기분나쁜 감정으로 변해갔다. 아무리 버텨봐야 언젠가는 팔을 내리게 될 것이었다. 이미 남자의 팔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실패하기로 되어있는 이야기의 결말을 혼자만 모르고 있다는 듯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도 호달의 신경은 온통 맞은편 남자에게 쏠렸다. 어떻게든 이 지루한 드라마의 끝을 내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결국 안절부절하며 건너편을 힐끔대다 휴대폰을 살짝 들어 사진을 찍었다.
찰칵!
조용한 열차 안에 셔터 소리가 짧게 울렸다. 순간 남자가 눈썹을 꿈틀했다.
호달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SNS단톡방에 ‘2호선 빌런’이라는 제목을 붙여 사진을 전송했다.
재수 시절 학원 근처에서 술 마시고 게임하다 만난 루저들의 톡방이었다. 돈 얘기를 하기에 그나마 그들이 제일 만만했다.
"이번 역은 신림, 신림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마침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고 호달은 제발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사진에 반응하길 바라며 열차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