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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딛고

by 이찬란




호달은 바닥과 맞붙은 할머니와 아버지의 유골함 앞에 앉아 긴 숨을 내뱉었다. 납골당은 여전히 허름하고 적막하고 으스스할 정도로 서늘했다. 다녀간 지 겨우 삼 일이 지났을 뿐인데 몇 년이 훌쩍 지난 듯 까마득한 기분이었다. 고시원에서 훔쳐 먹은 새벽밥이 명치에 걸려있는데도 허기가 달래지지 않아 연신 누룽지 사탕을 까먹었던 그날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리고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일 정도로 달았던 누룽지 사탕의 맛. 고작 사탕 한 알만큼의 단맛에도 사레들려 눈물을 쏟을 정도로 호달의 삶은 쓰디썼다.

“나 또 왔어.”

호달은 유골함 앞에 나란히 놓인 할머니와 아버지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국수 다발을 들고 있는 할머니의 앙다문 입술에 설핏 미소가 스쳤다.

“좋아? 손주 떼 놓고 아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투정부리는 아이처럼 입을 삐죽대며 호달은 가방에서 접이식 방석과 소주병, 종이컵, 사탕 봉지를 차례로 꺼냈다. 그리곤 방석을 잘 펼쳐 그 위에 소주를 가득 채운 종이컵과 누룽지 사탕을 가지런히 놓고 두 번 절했다. 앞문을 활짝 연 버스 앞에 선 아버지가 허리에 양손을 올린 채 호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의 호달보다 어린 나이에 버스에 올라 버스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


어느 새벽 서울로 올라오는 인적 드문 고속도로에서 아버지의 버스와 맞은편 트럭이 충돌했다. 반주를 한잔한 상대편 기사가 깜빡 졸았던 것이다. 버스는 트럭과 충돌한 후 한 바퀴를 돌아 도로 바깥으로 추락했다. 술을 마신 사람은 살았고 아버지는 죽었다. 그게 경찰이 할머니에게 전해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호달이 알고 있는 죽음은 조금 달랐다.

사고가 나던 날 아버지는 꽤 멀리 다녀오는 길이었다. 아버지의 다이어리에는 그날의 행적이 자세히 적혀있었다. 아버지는 신림동 난곡입구에서 출발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화성, 평택에 도착해 늦은 아침을 먹었다. 뚜렷한 메뉴 없이 백반을 파는 식당에서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 먹은 후 평택과 아산을 잇는 방조제를 건너고 난 뒤에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해남까지 갔다. 일부러 시간을 늦추려는 사람처럼 중간중간 공원이나 주유소, 수퍼 같은 곳에 들렀다. 들른 곳마다 그가 구매한 물품, 주변 풍경에 대한 짧은 메모가 적혀있었다.

그러나 ‘끝집’이라는 상호 옆에는 메모 없이 주소만 덜렁 적혀있었다. 호달은 그곳이 아버지의 최종 목적지였으리라 추측했다. 거기에 잘 아는 사람이 살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온종일 걸려 도착한 곳에서 아버지는 하룻밤 묵지도 않고 서울로 핸들을 돌렸다. 어쩌면 기대했던 사람이 그곳에 없어 실망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꿈에 나타날 때마다 눈이 발갛게 부풀어 오르도록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호달은 그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지만 내내 마땅한 상대를 찾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지나치게 또렷한 정신이었기 때문에 아마 죽는 순간까지도 그랬을 것이다. 전복되는 버스 안에서 마지막으로 느낀 감각이 무엇이었을까. 알고 싶지 않은데 자꾸 그런 생각이 떠올라 호달은 일찌감치 술을 배웠다. 할머니 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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