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칼 루이스 측의 음모였다. 단지 나는 함정에 빠졌을 뿐이다.’
벤 존슨은 자서전 ‘서울 투 소울(Seoul To Soul)’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남자는 그 말을 굳게 믿었다. 근거를 대라면 얼마든지 댈 수도 있었다.
육상 선수 출신 부모님 아래서 일찍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성장한 칼 루이스와 달리 십 대 중반에 육상을 시작한 벤 존슨은 불과 몇 년 만에 세계적인 대회에서 메달을 휩쓸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것은 타고난 재능을 가진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는 주 6일 하루 4~5시간씩 달리는 연습벌레였으며, 88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 전 이미 다섯 차례나 칼 루이스에게 패배를 안겨준 전적이 있었다. 특히 1987년 로마세계선수권 대회 100m 경기에서는 9.83이라는 세계신기록까지 세우며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놀라운 반응 속도를 가진 스타트에 빠른 피치까지 더한 벤 존슨의 주법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어느 날 혜성처럼 등장해 세계를 열광에 빠트린 벤 존슨, 가난한 자메이카 출신 배달부, 그러나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자기 앞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버린 기적의 사나이. 그런 그가 스스로 함정을 팔 리 없었다. 분명 음모다. 음모여야 했다. 남자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피시방 매니저의 단단한 팔이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짓눌렀다. 까슬까슬한 시멘트벽의 돌기가 등을 후벼파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힘껏 버둥거려도 단단한 팔은 풀리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짧은 순간 치솟았던 분노는 늘 그렇듯 익숙한 무력감으로 변했다. 호달이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남자는 깊은 패배감에 사로잡혀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호달은 바닥에 쓰러진 채 배와 가슴, 얼굴을 가격당했다. 좁고 컴컴한 창고 안이 흥분한 외침과 욕설, 신음으로 가득 찼다.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불빛이 날을 세우고 그들을 비췄다.
퍽!
또 한차례 둔중한 마찰음이 들리고 뭔가가 남자 앞으로 미끄러져 왔다. 호달의 휴대폰이었다. 아주 잠깐 그는 망설였다. 그러나 곧 휴대폰을 열어 창고 안의 광경을 녹화하기 시작했다. 몸 밖으로 튀어나올 듯 세차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남자는 호달과 매니저의 얼굴이 보이는 각도로 꾸물꾸물 기어가 몇 초간 촬영을 계속했다.
‘됐다, 이제 몰래 빠져나가기만 하면 돼. 나가서 신고를 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매니저가 몸을 돌렸다.
“어딜 가게!”
남자는 살기 등등한 매니저의 눈을 마주한 순간 재빨리 몸을 일으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노친네 거기 안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