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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피 Mar 19. 2021

30. 아파트 한 채면 행복해질 수 있니?

/ 가난한 자의 변명

지금은 아파트로 개발된 하월곡동 77번지. 70~80년대 봉천동, 금호동과 함께 서울의 3대 달동네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초중고 모두를 그 근방 학교를 다닌 내겐 고향과도 같은 곳이기도 하다.

중학교 시절 그 못된 담임선생은 늘 말했었다. 77번지 얘들은 구제불능이라고. 3만 원 정도였던 육성회비 조차 못내 던 나를 매일 종례 시간마다 일으켜 세우며 70명 급우들에게 창피를 주었다. 학교 다닐 의지도 없다며 면박을 주었고 늘 짜증 섞긴 얼굴로 나를 대했다. 20대 후반의 음악담당 선생이었던 그녀로 인해 난 많은 상처를 입었었다. 교통비가 없어 하월곡동 77번지에서 학교가 있던 월계동까지 1시간을 걸어 다녔던 몇몇 아이들의 마음을 그녀는 헤아리지 못했다.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엔 구경거리가 많았다. 당시엔 부촌이었던 장위동 일대와 (구) 35번 버스 종점 근처의 군것질 거리는 대리 만족의 수단이기도 했다. 특히 지금은 공원으로 바뀐 월곡산 꼭대기 일대는 없어선 안 될 놀이터였다. 동네의 많은 아이들은 월곡산을 빡빡산이라 불렀다. 동덕여대 뒤 폐채석장과 곳곳에 깎아 놓은 나대지는 야구와 축구 놀이에 제격이었고, 작지만 좁은 계곡도 있어 물놀이도 가능했었다. '빵꾸'라는 별명의 단짝 친구는 늘 야구배트 하나를 들고 빡빡산에 올라가면 어둑해서야 쉰내 나는 입으로 내려오곤 했었다. 야구를 하다 시커먼 머리 안에 상처를 입고 50원 동전만 한 살갗이 보여 '빵구'라는 별명을 얻었다.


우리집은 생활보호대상자였다. 통통했던 동네 반장 동실이 엄마는 좀 더 가난했던 우리집을 살뜰히 챙겨주셨다. 어느 날에는 학교 칠판이 안 보인다며 엄마에게 투덜대는 내 얘기를 듣고 동실엄마는 바로 미아삼거리에 있는 대지안경점으로 데려가서 안경을 맞춰주었다. 5만 원 정도가 들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꽤 큰돈이었다. 영세민이었던 우리에겐 주기적으로 정부미 20kg도 나왔다. 그것으로 여동생 둘과 나는 한 달을 살 수 있었다. 저 아래 동사무소에서부터 좁은 어깨에 쌀가마니를 짊어지고 20분 정도 올라와야 단칸방 우리집이였다.

마음씨 좋던 동실엄마는 내가 고등학교 들어가던 해(또 다른 선생이었던 작은아버지는 나의 인문계 진학을 한사코 반대하였다. 가난한 집 아이는 실업계 가서 빨리 졸업하고 돈 벌어야 한다고...), 다락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판잣집을 이리저리 수리하더니 다락 하나를 더 만들어 주셨다. 하나는 내방 또 하나는 여동생의 방인 샘이었다. 여름이 되면 지붕의 열기가 그대로 다락방에 전해졌으며 겨울 새벽녘엔 단칸방으로 내려와 몸을 녹여야 했다. 4살 아래인 여동생은 불쑥 튀어나온 쥐들에 소스라치게 놀라기 일쑤였고 그나마 밤 사이 물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컴퓨터 모니터 크기만 한 다락방 창문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근사했다. 아마 평생 그 느낌은 기억될 것이다. 멀리 미아사거리, 삼양동이 보였고 더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도 바라볼 수 있었다. 야경은 화려했으나 붉은색 십자가가 가장 많이 보였다. 그것에 기대어 참 많이 기도했던 것 같다. 제발 쥐 좀 사라지게 해 주고 내일은 따뜻하게 해 달라고...

그렇게 내게 집은 복수의 목적이 되었다. 돈을 벌게 되면 첫 번째로 무조건 집을 사는 것이 목표였다. 1,900만 원의 전세 대출금으로 시작한 사회생활은 34살에 이르러 7천만 원의 대출금을 끼고 일산에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재테크보다는 무작정 집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주중은 일산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고 주말은 딸과 함께했다. 몇 번의 투자 실패로 45살에 그 아파트를 팔게 되었다. 다시 집이 없어졌다. 그 때 중학생이었던 딸은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고 말았다.


‘아리다’는 표현만큼 사실적이고 절제된 단어는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딸만 생각하면 아리다. 너무 아리다. 현명하지 못한 아빠를 만나 평범치 못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던 그녀에게 미안하고 그로 인해 번민했던 내게도 미안하다. 둘 모두에겐 슬픔이 있다. 미안하다는 위로의 말로는 부족하다. 다만 내 마음이 그러할 뿐 현실적으로 건네 줄 무엇도 없다. 그래서 오늘도 우울하다. 다만 최선을 다 할 뿐이다. 그러다 한 번쯤은 이해해 줄까 하는 마음으로...

딸과 둘이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되도록이면 매일 카톡을 통해 그녀에게 안부를 묻는다. 한 달에 두 번은 삼겹살을 먹으며 잡스런 얘기를 나눈다. 쓸데없는 아빠의 조언을 들어주는 척하는 딸을 보고 이젠 다 컸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딸이 하고 싶은 일과 공부에 대해 허튼 얘길 교환하기도 하고 아빠를 닮아 눈이 이쁘니 턱선이 갸름하니 하는 유전의 우월성도 말한다. 비록 그녀에게 준 것이 부족하지만 모자란 만큼 다른 것으로 채워주고자 노력 중이다. 올해버킷리스트 말하며 한라산 등반과 오사카 '킨류라멘'을 먹으러 가자 했다. 기회가 되면 그러자 했다.   


정신과 물질이 조화를 이루면 행복하다. 성공한 삶이라 생각한다. 아직 나는 그러하지 못하다. 부족한 부분을 다른 한 편으로 메워주려 노력할 뿐이다. 충분하지 못하겠지만 진심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더 이상 아파트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분명한 건, 물질은 결코 충족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단물을 자주 마시면 늘 목이 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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