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사라졌다. 명예와 돈과 사람, 가졌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눈을 감으면 다신 밖을 볼 수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과거가 무너질수록 나는 죽음에 더 가까이 가고 있었다. 어둠에 숨어 과거를 회상하는 날이 많아졌고 지난 것들에 매달리며 수 일을 허비하곤 했다. 생을 갉아먹는 미련 따위에 굴욕 당하며 그렇게 목숨의 일부가 버려지고 있었다.
홀로 남는 것이 두려웠고 얼마 남은 내 삶도 버려질 것 같아 초조해했다.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고 싶은 사람 또한 없었다. 나를 기다려줄 그 어떤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무리 안에 갇혀 있으나 섞이지 못하였으며, 그렇다고 밖으로 뛰어나갈 용기 또한 갖추지 못했다.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아 하루의 반은 잠만 잤다. 포기라는 것에 익숙해질수록 가슴은 더 무거워졌다. 모든 것을 버렸지만 버린 것에 자유롭지 못했다. 살아온 것이 후회이고 살아야 할 것은 의무로 남겨졌다. 영혼은 공허한 시간 안에 남겨졌고 뿌연 시각 속 나는 백지상태의 삶이 되었다. 내가 이룬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시들어 갔다. 눈빛도 숨도 육체도 시들어 갔다. 가진 것은 찌꺼기 같은 자존감뿐 허영에 갇힌 나는, 나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간혹 바람이 불면 몹쓸 불안과 염려를 함께 보내려고도 했다. 얼굴을 감싼 투명의 냄새를 맡으며 내 짐 전부를 그들에게 태워 보내려 한 것이다. 나는 내 힘이 아닌 타인의 뜻으로 이기지 못할 과거와 싸워왔다. 언제부터인가 내 생각 속엔 다른 이가 살고 있었다. 벗겨도 지지 않는 묵은 때와 같이 살갗을 덮은 채 나를 위장하고 있다. 익숙해진 것인지 편한 것인지 나 또한 그대로가 좋았다.
의미 없는 낮과 숨 죽인 밤을 보내면서 그렇게 나는 희미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나는 사라지고 있었다. 슬프다고 외롭다고 한들 귀기우려 줄 이 아무도 없었다.
무언가에 멀어진다는 것은 두려움을 움트게 했다. 홀로 됐다는 것은 두려움을 갖게 했다. 다른 이와 웃고 즐기며 때론 슬퍼했던 일이 또 다른 나의 삶이 돼버린 후, 일상의 시간과 공간은 엉키고 말았다.
사라진 모든 것엔 흔적이 있다. 사라지는 것에도 가치는 존재하고 나름의 의미마저 있을지 모른다. 있음은 줄곧 없음으로 그 존재를 증명해 왔듯이 시간은 기억에 의해 가름되어 왔다. 기억 안에서 과거와 현재는 재단되었고 미래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의지는 늘 시간 위를 달리고 있는 샘이다.
척박한 감정의 땅 위에도 비는 올 것이다. 삶은 정류장의 기다림과 같을 수 있다. 항상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언제 내 것의 그 무엇이 올지 모르는 무조건적인 기대와도 같다.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희망을 품거나 혹은 괴로워하거나 공포심을 갖는다. 미리 두려워하는 것은 내 살을 깎아 불안의 먹이로 주는 것과 같다. 지금의 처절함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내가 만들고 있다. 그 많은 기억의 잔재 속에서 우울과 슬픔만을 꺼내어 상처를 내고 있는 것이다.
현실은 공간에 의해 구분되지만 생각은 시간의 배열로 나눠질 수 있다. 기억을 정리하면 많은 것들이 새로워진다. 과거의 틀에 얽매이면 현재의 나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 묻어두는 편이 좋을지 모른다. '룰루랄라', 지금 이후로는 편의대로 기억하자. 그래야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