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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난지 Apr 26. 2021

다시 쓰는 순정의 의미

골드키위새 작가의 <순정 히포크라테스>

흔히 재미있는 작품을 찾으려고 할 때 ‘장르’로 검색하곤 합니다. 장르는 수용자들이 가장 손쉽게 취향의 콘텐츠를 찾을 수 있는 내용분류체계입니다. 장르별로 관습화된 이야기구조가 있어서 수용자들은 장르를 통해 기대감에 부응하는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영화비평가 로버트 워쇼(Robert Warshow)에 따르면, ‘장르가 성공한다는 것은 그 장르의 관습이 일반 대중의 의식을 불쑥 찾아간 다음, 일련의 특정한 태도들과 특정한 미학효과의 장치를 수용하는 것’이며 장르에서의 독창성은 ‘기대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지 않고 강화하는 범위 안에서만 허용’되기 때문이죠. 그러나 별다른 의식 없이 반복되는 장르의 관습들은 수용자들의 재미를 떨어트리게 만들 뿐 아니라 감상을 진부하고 획일적으로 만드는 원인입니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장르는 점점 독자에게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골드키위새 작가는 로버트 워쇼가 우려했던 장르의 진부함을 참신함으로 바꾼 작품들로 주목받았습니다. 기존 장르의 관습을 보란 듯이 전복시키면서 말이죠. 다음웹툰에서 2015년에 연재되어 ‘오늘의 우리 만화상’까지 수상했던 <죽어도 좋아>는 로맨스 장르인 것을 매 회마다 작가가 언급해야 할 정도로 로맨스의 전형적 요소들이 잘 나타나지 않던 작품이었습니다. <죽어도 좋아>가 연재 당시 지속적으로 전달한 메시지는 주인공 이루다의 로맨스 보다 가부장제 사회 구조 속에서 태어난 또 한 명의 주인공, 백 과장이 주변인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관습적 태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독자들도 이 작품을 보면서 이루다의 사랑의 결실을 궁금해 했지만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백 과장의 변화(개과천선)였던 것이죠. <죽어도 좋아>는 로맨스 장르의 새로운 버전으로 보일 만큼 독특했습니다. 골드키위새 작가의 최근작, <순정 히포크라테스>에는 제목에서부터 ‘순정’이란 단어가 등장합니다. 의학의 신 히포크라테스도 등장하구요. 제목을 관습적으로 해석해보자면 병원에서 사랑하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도 골드키위새 작가는 ‘순정’의 의미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순정 만화’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화를 지칭해왔습니다. 순정만화의 여성 주인공은 종종 성장하지 못한 수동적인 소녀로 비춰지고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랑을 통한 구원에 의해서였죠. 사랑을 통해 구원받으려면 소녀는 사회에서 바라는 모습이 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현대 여성들이 추구하는 바와 많이 다르죠. 여성의 삶과 정체성은 누군가에 의해 구원되는 사랑과 사회가 원하는 순수하고 감성적인 소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순정 히포크라테스>에서 골드키위새 작가의 의학 로맨스는 병원에서 사랑하는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 전개를 하고 있습니다.    

  

<순정 히포크라테스>의 주인공 사해는 할머니 몰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의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가부장적 가치관에 사로 잡혀 있는 할머니는 사해가 똑똑한 것을 알면서도 여자는 똑똑할 필요가 없다며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사해에게 결혼해서 자녀를 낳을 나이에 직장을 다니고 있다며 타박하죠. 그런 할머니께 의대에 진학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해는 할머니의 말씀과 행동이 부당하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을 알지만 할머니의 삶을 알기에 이해하려 애를 씁니다. 사해의 할머니는 매우 똑똑한 여성이었지만 그것을 펼쳐낼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고, 똑똑했기 때문에 오히려 고통 받았던 시간이 있었기에 사해에게까지 ‘여성으로서의 삶’을 강요하는 것이었죠. 사해가 할머니를 이해하는 이유는 그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삶을 살아온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선택 당한 삶을 살아야 했던 할머니는 가부장제 속에서 순응해야만 했던 것이죠. 


사해에게 의대 진학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한 방편입니다. <순정 히포크라테스> 시즌2 16화에서 할머니는 병에 걸려 수술을 해야 하지만 아픈 사람을 써줄 직장은 없다며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항상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했던 할머니는 아픈 것이 죄를 지은 것처럼 느낍니다. 그런 할머니를 껴안으며 사해는 말합니다.     


 “우리 살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이 삶을”     


<순정 히포크라테스>는 여성의 삶에만 주목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부장제 사회가 성별에 관계없이 개개인에게 가해지는 은근한 폭력들과 그 폭력으로 인한 고통을 보여줍니다. 누구도 이 폐쇄적인 구조 속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요. 결국 골드키위새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서 전달하려 한 것은 그렇기 때문에 삶의 주인 자리를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존재에 대한 긍정, 내 삶에 대한 긍정은 삶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을 알 때 가능한 것입니다.      


‘순정’ 속의 소녀는 어느새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을 만큼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골드키위새 작가의 <순정 히포크라테스>에서 순정은 기존의 순정과는 다를 것이며 새롭게 갱신될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어떤 것에도 쉽게 선택권을 넘기지 않는 주인공, 사해의 모습을 통해서요. 독자에게 순정이란 단어가 낡고 고루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재미있게 느껴지려면 장르의 한계를 알고 현재에 적합한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합니다. 골드키위새 작가의 <순정 히포크라테스>처럼 말이죠. 



청강뉴스레터. '재미의 이유'에 싣기 위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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