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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난지 Apr 26. 2021

우리가 진부한 소재에 빠져드는 이유

<아, 지갑 놓고 나왔다>, <관내분실>, <남남>

한 때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잃어버린 부모, 자식 찾기’라는 플롯이 빈번하게 등장해서 구태의연하다는 평가를 받곤 했습니다. 아직도 많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임무이기도 하죠. ‘부모자식’ 관계는 옛 이야기에서도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입니다. 영웅 신화에서 영웅들은 대개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정체성을 고민할 나이가 되면 부모를 찾아 떠나지요.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다룬 이야기들이 이토록 오랫동안 사람들을 사로잡은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미역의 효능 작가의 <아, 지갑 놓고 나왔다>에는 함께 살 수 없는 애틋한 모녀가 등장합니다. 노루는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지만 엄마인 선희가 걱정되어 현세를 떠돌고 있는 영혼입니다. 아홉 살 노루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 엄마가 밥을 굶을까 걱정되어 놀이터의 모래를 팝니다. 모래를 파다 보면 가끔씩 동전이 나오거든요. 이렇게 얻은 동전을 엄마의 머리맡에 놓아두는 노루는 엄마보다 훨씬 어른 같습니다. 선희는 너무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어 노루를 친구처럼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선희에게 노루는 의지할 대상이었으나 노루에게 선희는 보살펴야할 대상이었으니, 일반적인 엄마와 딸의 역할이 전도된 상태죠. 그러니 노루는 죽어서도 엄마 걱정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노루의 어른스러움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노루의 솔직한 심정은 쌓이고 쌓여 한꺼번에 폭발합니다. “나도 아이처럼 굴고 싶었어!”하고 외치는 노루를 보노라면 그 심정에 감정 이입되어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무 도움 없이 외롭게 노루를 키우며, 미처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선희의 처지도 가련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노루는 엄마를 돌보기 위해 환생을 하려고 모험을 떠납니다. 어떠한 결과를 맞이할지라도 노루와 선희가 행복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김초엽 작가의 <관내분실>에서도 모녀가 등장합니다. 소설 속 주인공 지민은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릅니다. 지민이 기억하는 엄마는 ‘지민에게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준 적 없는 형편없는 엄마’였기에 이해하려고 노력해본 적이 없습니다. 지민은 임신을 한 후 태아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낍니다. 엄마도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이미 돌아가신 후입니다. 지민은 그제 서야 엄마, 김은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이 지민의 머릿속에서 재구성 됩니다. 어쩌면 엄마는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지민은 고인들의 기억과 행동 패턴을 저장한 마인드를 통해 엄마를 다시 만나 이렇게 말을 전합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게 진짜로 엄마의 지난 삶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이제…… 엄마를 이해해요.”     


정영롱 작가의 <남남>은 다음 웹툰에서 절찬리에 연재 중인 웹툰으로, 작품 속 엄마와 딸은 각자의 취향과 욕망대로 유쾌하게 살아갑니다. 엄마 은미는 고등학생 시절에 딸 진희를 낳았습니다. 은미가 긴 세월동안 홀로 진희를 낳아 기를 수 있었던 것은 친구 미정과 미정의 엄마 덕분이었습니다. 은미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두 사람은 물심양면으로 도왔죠. 은미와 진희는 함께 세간의 편견과 맞서 싸우며 살아온 덕분에 모녀 관계를 넘어 진한 동지애를 느끼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다반사였지만, 쿨한 딸 진희는 대책 없는 엄마를 엄마이자 한 명의 개인으로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엄마도 개인의 삶과 욕망이 있을 것이란 것을, 충격적인 장면을 대면하고서도, 쿨하게 인정하고 넘어가는 걸 보면 말이죠(충격적인 장면은 <남남> 1화에서 성인인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은미와 진희 모녀는 그런대로 서로를 이해하며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변의 진심어린 관심과 여러 가지 고락(苦樂)을 함께 겪을 시간이 있었기에 서로에 대한 이해가 남다른 것입니다.  <남남>의 진희는 <아, 지갑 놓고 나왔다>의 노루와 닮은꼴입니다. <남남>의 은미와 <아, 지갑 놓고 나다>의 선희, <관내분실>의 은하도 서로 닮았습니다. 그렇지만 노루에게는 진희처럼 쿨한 어른이 되기에는 주어진 삶이 너무 짧았습니다. 진희는 노루보다 엄마를 이해할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진희는 엄마와 자신을 분리시키고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서서히 깨우쳤을 것입니다. 노루가 살아있었다면 진희처럼 쿨한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요? 선희와 은하도 은미처럼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의젓한 친구와 어른이 있었다면 노루와 지민을 어른스럽게 보살피고 사랑해줄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었을까요?   

   

<아, 지갑 놓고 나왔다>, <관내분실>, <남남>, 모두 엄마와 딸이 등장합니다. 이들이 잃어버린 것은 엄마, 딸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이들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성장합니다. 영웅 신화 속 영웅들에게도 부모 찾기는 표면적인 목표일뿐, 진정한 목적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로버트 맥키는 ‘이야기는 삶의 은유’라 했고, 알프레드 히치콕은 ‘인생의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것이 이야기(영화)’라 했습니다. 진부하게 느껴지는 부모자식 관계를 다루는 콘텐츠에 아직도 우리가 감동받고 사로잡히는 이유는 그것이 곧 우리의 삶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구태의연함은 어떤 소재를 선택하느냐의 문제보다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주하여 보여줄 것인지가 관건인 것입니다. 같은 소재, 같은 테마, 같은 플롯을 다루면서도 다양한 양상으로 변주하여 보여주는 <아, 지갑 놓고 나왔다>, <관내분실>, <남남>처럼 말이죠.          



청강뉴스레터. '재미의 이유'에 싣기 위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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