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난지 Apr 29. 2021

악(惡)의 조건은 변한다

NBC 드라마 <굿 플레이스>


재미있는 이야기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주인공(protagonist)의 욕망을 가로막을 적대자인 안타고니스트(antagonist)의 존재입니다. 주인공이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수록 이야기는 시시하고 재미없게 흘러가게 되죠.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안타고니스트 창조 전략은 시대마다 조금씩 양상이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한 존재들을 소환하여 악(惡)하게 재현하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안타고니스트는 반인반수로 인간이 아닌 존재였고 그들은 사회 규범에 위배되는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매우 강한 힘을 갖고 있지만, 결국 영웅에 의해 처단됐죠. 그래서 주인공은 선(善)인이며 안타고니스트는 악인으로 규정되었고 선과 악의 기준은 당대의 사회에서 옳다고 여겨지는 규범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모순적이게도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재미없어집니다. 주인공의 목표를 가로막을 요량으로 만든 적대자를 악의 표상으로 여겨버리면서 캐릭터가 단순해지는 것이죠. 이야기가 인생이라면 캐릭터는 인간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인생이 반영되어야 할 이야기에서 현실감 없이 악한 행동만 하는 캐릭터는 이야기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 이야기에서 무조건적인 선인이나 악인처럼 이분법으로 구분해 등장시키면 캐릭터와 작품은 매력을 잃습니다. 인간이 그러하기 때문이죠.     


악의 기준이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고 전제할 때 사회가 변화할수록 악의 기준도 변화해야겠죠. 드라마 <굿 플레이스>는 평범하게 살아온 엘리너가 사후세계인 굿 플레이스에 도착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굿 플레이스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이 전 우주에 선 또는 악을 추가시키는데 긍정적인 가치의 행위를 통해 우주에 선한 영향력을 미친 사자(死者)만이 갈 수 있는 세계입니다. 반대의 의미로 배드 플레이스도 존재한다죠. 특별히 선을 추구하며 살지 않았던 엘리너는 자신이 속한 굿 플레이스에 대한 의문을 품고 진실을 파헤쳐갑니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사람들의 행위를 선하고 악하게 평가하는 걸까요? 굿(Good)과 배드(Bad)는 우리가 납득할만한 기준을 갖고 있는 걸까요?      


<굿 플레이스>는 이러한 질문에 여러 가지 방향으로 답을 얻으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윤리적 딜레마에 우리를 몰아넣고, 때로는 착하지만 우유부단하고 답답한 굿 플레이스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또 배드 플레이스에 있는 사람들이 현실의 우리처럼 아주 약간의 비양심, 아주 약간의 비도덕, 아주 약간의 이기적 사고 등을 일삼는 보통의 사람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주죠. 이러한 다양한 모습을 통해 선과 악의 구분은 일반적인 생각보다 그 경계가 희미하고, 악은 괴수의 외형을 가졌거나 악한 행동을 하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이들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면면에도 있다는 것을 인식시킵니다.      


종교나 신화, 상상 속에 존재하는 사후세계를 소재로 만든 콘텐츠이지만 <굿 플레이스>는 재미있습니다. 주인공의 적대자들은 배드 플레이스에 살고 있는 말 그대로 악마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악한 마음과 행동으로 점철되어 있기에 현실과 동떨어져 오히려 우스워 보입니다. <굿 플레이스>에서 나타나는 비현실적인 묘사들 속에서 현실과의 괴리를 좁히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한 현실적인 고찰입니다. 실제로 우리 삶의 괴로운 문제와 선택은 두부 자르듯 명쾌하게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착하거나 나쁜 선택과 행동은 있지만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굿 플레이스>의 주인공들을 선과 악으로 단정 지어 구분하기 어려운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늘 모순 속에서 적당히 착한 마음과 이기적인 마음속에서 어중간한 선택과 행동을 하듯이요.         



청강뉴스레터, '재미의이유'에 싣기 위해 쓴 글.

 

        

작가의 이전글 다시 쓰는 순정의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