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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 Jul 03. 2023

합정

장소들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6호선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수하 맞은편 자리에 앉은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와 짙은 눈매를 가진 여성이 에어팟을 낀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고개가 일정한 흐름으로 박자를 맞추는 것처럼 흔들린다. 여성 옆에는 등산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좌석 두 자리를 모두 차지했다. 결코 의도가 아니다. 좌석 하나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그의 덩치 때문이다. 남성의 등산복은 개구리같은 그의 배를 팽팽하게 감싸고 있었다.




수하는 열차가 움직일 때마다 여성의 반바지가 자꾸만 춤을 추는 것을 발견했다. 역에 정차할 때마다 여성의 반바지가 다시 그의 허벅지에 착륙하는 순간에, 부풀어오른 남성의 배가 통-하고 진동하는 순간에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아 간신히 고개를 돌린다. 그순간 지하철 안내음은 합정, 합정-을 목놓아 외친다.




합정. 2호선과 6호선이 정차하는 그곳에서 수하는 A와 헤어졌다. 2호선 신림이 집이었던 그는 6호선 증산역이었던 수하를 꼭 합정까지 데려다줬다. 수하와 A는 6호선 응암행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서로의 손을 놓았다. "새절까지 가버리면 안돼" 새절까지 가버리면 안돼. 정신을 놓다가 증산역을 놓쳐 새절역에 내리곤 했던 수하를 걱정하는 그의 작별인사였다. 




A를 보내기 싫을 때 수하는 A의 손을 잡고 다시 지하도 계단을 올랐다. 그럴 때마다 A는 못이기는 척 수하의 손을 잡고 얌전히 그를 따랐다. 계단을 걸어올라 향초집과 꽃집을 지나면 교보문고가 나왔다. 좀만 더 있다가 가면 안돼? 이미 교보문고 안으로 들어온 수하의 투정에 A는 그저 웃기만 했다. A의 손을 잡고 미로 같은 서점 안을 빙글 빙글 돈다. 도착지점을 정하는 거야. 비문학쪽으로 안내해줘. 그러면 바로 비문학 칸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길치인 수하는 한번도 곧바로 찾는 적이 없었고, 다음 차례인 A는 단숨에 과학, 문학, 잡지 칸을 찾아내곤 했다. 그런 날들이 있었다. 




7번 출구로 나가 망원역을 향해 쭉 걸어가다 보면 다람쥐 인형이 잔뜩 놓여진 카페가 있다. 여름에는 매장 밖에 텐트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한 채 합정의 여름을 구경할 수 있게 해놓은 곳. 그곳은 수하와 A의 아지트였다. 여름엔 부러 에어컨을 틀어놓는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닌 그곳을 찾았다. 여름밤, 텐트 의자에 앉아 술에 취한 이들을 보는 것은 또 하나의 별미였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수하와 A 또한 취하는 것만 같았다. 합정의 취기, 해가 졌음에도 느껴지는 후덥지끈함, 한강의 물내음이 배어있는 습기. 




빨강, 초록, 노랑, 각양각색의 네온사인은 도로 위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어깨 동무를 한 채 차없는 도로를 흐느적 흐느적 걸어다녔다. 네온사인 마냥 붉은 그들은 행복해보였고, 관객이 된 수하와 A 역시 발갛게 열이 올랐다. 너 뺨이 붉어졌어. A가 커다란 손을 들어 수하의 뺨을 감싼다. 수하는 A의 손 안에서 얼굴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저 멀리 들려오는 검정치마의 노래. 완연한 여름이었다.




다음 역은 망원- 망원 역입니다. 지하철 안내음에 수하는 회상에서 깨어났다. 지하철은 망원에 도착했다. 벌써 합정을 지나친 것이다. 합정의 A는 이제 없다. 수하는 천천히 숨을 뱉어보았다. 천천히 숨이 말려 올라왔다가 공중으로 흩어진다. 그렇게 합정이 흩어졌다.






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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