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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 Jul 03. 2023

여의도

장소들

수하는 간신히 만원 버스에 몸을 구겨 넣었다. 이번 버스를 놓치면 20분이 넘게 여의도 한복판에서 추위에 떨어야만 한다. 광흥창역을 지나치는 이 버스는 여의도란 섬과 서울을 연결해주는 몇 안 되는 버스 중 하나였다. 물론 다른 버스를 탈 수도 있었지만, 다시 말하건대 '광흥창역'을 지나치는 버스는 몇 대 없었다. 수하는 익숙하게 6시 10분에 시작하는 정치 시사 라디오를 재생한다. 진행자가 어김없이 청취자들에게 오늘 하루의 고단함을 묻는다. 그리고 오후에 수하가 발제했던 기사와 같은 아이템을 헤드라인으로 소개한다. 수하의 가슴은 누군가의 등에, 메신저백으로 덮인 엉덩이는 누군가의 허벅지와 맞닿는다. 그야말로 만원 그 자체다. 그때다. 누군가 수하의 어깨를 툭- 하니 친다. 너도 이거 탔네? A다. 물감이라도 뿌린 듯 수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놀라지 않은 척 고개를 숙이며 에어팟을 귀에서 빼낸다. 조심해야 한다. 이 만원 버스에서 에어팟을 놓치기라도 하면 찾을 수 없을뿐더러 지금 자신이 긴장하고 있음을 들키는 것과도 같다. 야속하게도 에어팟은 제 구멍에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 아무렇게나 양주머니에 에어팟을 찔러 넣는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로 - A를 맞이한다. 끼익- 아직 말을 꺼내지도 못했는데 대교에 들어서던 버스가 급정거한다. 순식간에 A와 수하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수하의 숨이 나가고 들어오는 공간까지 그가 들어온다. 탔네??의 물음표들이 종종걸음으로 수하의 인중 위에 닿는다.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선배 퇴근 안 하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데, 오랜만에 봐서 보고 싶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전혀 다른 언어들이 튀어나온다. 너 퇴근하고 나도 바로 나왔어. 서로의 숨이 오가는 사정거리 속 대화들. 정처 없이 이리저리 데굴거리던 수하의 눈동자가 A를 향한다. 검은 바시티 자켓에 백팩. 돌돌 말려져 있는 회색 울 머플러. 눈동자를 좀 더 올려본다. 뿔테안경을 낀 A가 수하를 바라보고 있다. 눈동자 마주쳤다- 수하는 지금 죽고만 싶다.






마침 버스가 다시 움직여 한강대교로 향한다. 여의도에서 수많은 차량들이 서울을 향해 쏟아져 나온다. A와 수하가 탄 역시 대교에 막 진입했다. 늦은 겨울,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버스 안 사람들이 모두 일몰을 바라본다. 해는 점점 떨어져 국회의사당에 걸쳐진다. 아 예쁘다- 자신도 모르게 수하의 입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A는 그런 수하를 잠자코 지켜본다. 선배, 일몰 너무 예쁘지 않아요. 전 여기 지나갈 때마다 저 해를 보면 행복해져요. 그러냐? 매일 여기 출퇴근해 봐. 다 지겨워져. 아 선배도 진짜... 문장은 날이 서 있지만, 수하의 목소리는 부드럽기만 하다. 이제 무슨 말을 하지. 이제 어떤 말을 해야 선배가 흥미롭다고 느낄까. 흥미롭다고 느낄까!






다시 버스에 제동이 걸렸다. 퇴근길 정체로 버스는 거북이가 됐다. 다시 버스가 멈추자 가뜩이나 붉은 수하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이 대교 위 버스 안 사람은 마치 A와 자신뿐인 것만 같다. A와 이렇게 대화를 나눌 시간을 얼마나 고대해 왔던가. 사무실에선 할 수 없는 말들을 지금 해야 한다. A에게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다. 배스킨라빈스 중 어떤 맛을 제일 좋아하는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무엇인지, 지금 겨울은 너무 춥지는 않은지, 그리고 어제 꿈은 꿨는지.




수하는 어제 A의 꿈을 꿨다. 사실 요즘 수하는 매일 새벽 A의 꿈을 꾼다. 꿈의 내용은 단순하다. 그냥 사무실에서 사람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수하와 A만 있는 것이다. 그때 밖에서 새하얀 눈이 내린다.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떨어지는 눈만 바라볼 뿐이다. 그런 꿈들을 꾼다. 그것은 아마도 수하가 매일 A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아무튼 A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더 이상 침묵 속에서 이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   순식간에 감정들이 드러나는 수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A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A가 웃음을 터뜨리자 수하는 조급해지기만 한다.  선배는 왜 웃는 걸까. 지금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수십수백의 고민들이 물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팟- 하고 터진다.




수하야, A가 다시 입을 뗀다. 네 선배. 오늘도 고생 많았어. A의 입꼬리가 마치 대교의 포물선처럼 휘어진다. 자진모리장단으로 내려치던 수하의 심장이 잠시 멈추고 만다. 쿵. 멈춰버린 심장은 휘모리장단으로 거세게 몰아친다.





선배도 고생 많았어요.




멈췄던 버스가 다시 광흥창역을 향해 달려간다.




여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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