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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100일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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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May 26. 2022

결국 모든 생명은 제 자리를 찾아간다

내가 나를 다시 키우는 100일의 휴가 - 10일 차

감사하고자 들면 실은 모든 것이 감사다. 불평하기로 마음먹으면 모든 것이 불만족스럽듯. 지친 마음을 돌보며 내가 나를 다시 키우는 100일의 휴가 10일 차. 목적지는 서울숲이다. 뚝섬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 문득 최근 지인과 함께 했던 오후의 산책이 떠올랐다. 동시에 저절로 올라가던 마스크 속 입꼬리. 걷기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지도 앱에서 녹색이 많이 보이는 곳을 찾아봤다던. 덕분에 햇살 좋은 날 초록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길 걸었더랬다. 다시 생각해도 참 고마운 이.


평일에도 서울숲엔 꽤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신록의 계절을 함께 즐기는 이들. 사실 최근에 들렀으나 어쩐지 충분히 둘러보지 못한  아쉬워 다시 찾은 서울숲이다. 그런데, 조각 작품이 있었다고? 놀이터도? 양귀비도? 역시 서울숲도 참깨만큼 밖에 보지 못한 거였다. 눈길 가는 조각 작품들 천천히 둘러본 뒤 예뻐하는 양귀비 쪽으로 향했다. 양귀비는 매력이 흘러넘치는 꽃이다. 꽃을 만지던 시절 팔기 위함이 아니라 온전히 내가 보려고 사 오던 꽃. 몽우리 상태에선 어떤 색의 꽃이 필지 알 수 없다. 며칠 기다리면 동그란 몽우리를 뚫고 주황색, 흰색, 노란색의 꽃이 피는데 꼬깃꼬깃한 잎이 조금씩 드러나고 이내 거짓말처럼 활짝 펼쳐지는 그 모습이 그 자체로 그림이다.


2022.5.23 서울숲
2022.5.23 서울숲
가장 오래 감상했던 조각 작품 '바람 속 산책'


안쪽으로 들어가니 아늑한 숲 속 한가운데. 시냇물도 졸졸. 고요했다. 가만히 서서 키 높은 나무들이 추는 춤 한참 올려다봤다. 그리고 놀이터. 어릴 때부터 그랬던가. 기억에 없지만 무튼 어른 되고 나서는 놀이터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네, 시소, 미끄럼틀...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건 그네. 그게 어디든 길 위에서 그네가 보이면 타고 싶어 가슴 두근거린다. 그네는 2개. 하나는 아이가 타고 있었고 하나는 비어 있었다. 가방 멘 채로 냉큼 빈 그네에 올랐다. 크기로 미루어보아 아이들 전용은 아닌 듯해 마음 편히. 어느 40대가 이렇게 그네를 어린아이처럼 신나 하며 탈까. 입꼬리 귀에 걸릴 판이다. 한참 타다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하늘 위로 날아갈 것 같아 천천히 속도 줄인 후 내려왔다. 옆을 보니 아이는 가고 없고 20대 청춘들이 있다. 내가 타던 그네도 앳된 커플의 몫. 역시 놀이터에선 모두 아이가 되는 걸까.


그네 다음엔 줄 잡고 올라가기? 성큼성큼 오른 후 꽤 길이가 있는 2단 미끄럼틀도 탔다. 혼자서도 이렇게 재미있다. 놀이터 3종 세트 뿌듯하게 섭렵 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푸른 5월, 자연 속에서 걷고 또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2022.5.23 서울숲

구석구석 걸었다. 역시 다시 오길 잘했다. 적당한 위치의 벤치에 앉아 집에서 싸온 군고구마로 허기 달랜 뒤 일기장 펼쳤다. 흘려보내야 할 과거가 적지 않다. 그간 스친 인연들에게 용서 구한다. 동시에 용서하기로 한다. 그렇게 흘려보내기로 한다. 마침내 아쉬움 없는, 서러움 없는 이별 하기로 한다. 놓아주지 않고 그저 처박아두었던 나의 상처, 나의 아픔, 나의 괴로움, 나의 이기, 나의 우울, 나의 질투, 나의 초라함, 나의 시기 모두 꺼내 볕에 말리기로 한다. 그리고. 휘둘리지 않고 꿋꿋이 갈 것. 무소의 뿔처럼.


숲 속 벤치에 앉아 있노라면 지나가는 개미, 나무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벌레들이 인사한다. 놀랄 것 없다. 물론 어려서부터 무서워하던 비둘기가 근처에 오면 여전히 긴장하지만 그들 역시 내버려 두면 제 갈 길 간다. 그래. 모든 생명은 내버려 두면 제 자리를 찾아간다. 방해만 하지 않으면 말이다. 결국 찾아가는 중인데 시간이 무에 중요할까. 조급할 일 무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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