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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Dec 04. 2024

재수 없게 살고 싶습니다.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였다. 묵묵하게 내 일을 하고,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아-그래?'라고 흘려듣고는 했었다. 타인에게 신경 쓸 틈도 없었을뿐더러, 타인의 행동과 언행을 신경 쓰면서 내 시간과 감정을 쏟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할 때였다. 사실은 별 생각이 없었다. 


"재수 없어. 그쵸?"


내 옆에 앉아 있던 직원의 입버릇이었다. 상사를 향해서 말하기도 하고, 옆에 있는 직원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진심이 묻어 나오기도 했지만, 그냥 '아-배고파-'와 같은 말처럼 뱉어지는 말이라서 그렇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 직원과는 적절하게 이야기하고, 적절하게 거리를 두면서 회사생활을 했었다. 그 직원은 나를 보면서도 재수 없어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부정적인 말속의 부러움이 묻어난 긍정의 뒤틀린 표현.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 대하여 인정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감정부터 직업, 경제능력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부터 눈에 보이는 것까지- 인정하고 수용한다기보다는 배제하고 배척하는 모습이 더 짙다. 그래서인지 '좋겠다- 부럽다-'보다는 '재수 없다'또는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말들이 참 많이 보인다. 계속 보고 있자니 불편했는데, 지금은 그 말의 쓰임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알고 보니 그렇게 나쁜 말도 아니구나-라 했다.

 그래서인지 '재수 없다'라는 말이 계속 떠올랐다. 재수 없다는 말은 사람에게 쓰이는 형용사로서, '마음에 들지 않고 기분이 나쁘다.' 또는 '하는 짓이나 겉모습이 아주 거슬리거나 못마땅하다.'라는 뜻으로 무척이나 부정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대게 그 말의 쓰임에는 거슬리고 못마땅한 짓과 모습은 시기와 질투가 깔려있다. 선망인가, 부러움인가. '재수 없다'는 말의 이중적인 심리가 있었다.

 재수 없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그를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또한 그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도 온다. 그러면서 지금의 나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거나, 지금의 내가 초라해 보이면서 슬퍼질 때도 있다. 재수 없던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근래에 들어서는 '나다운 나'에 집중하면서 스스로를 다지고는 있다고는 하지만, ' 나다운 나'에게도 롤모델은 있고, 선망기준이 있다. 기준은 순수한 '나'에게 집중되기는 힘들다.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이걸 좋아해. 또는 타인들이 싫어하는 이것을 좋아하는 나의 마이너 취향이야. 등- 나다운 나에게는 기준이 있다. 그렇게 완성된 나는 누군가에게 환호를 받기도 하고 부정을 당하기도 한다. 환호는 반갑지만 부정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순간 나다운 나는 무너지고 만다. 그렇게 나다운 내가 사라지면 재수 없는 사람과는 멀어진다.


나다운 삶이 타인에게는 부러움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재수 없음은 가장 나다운 삶을 잘 살고 있기에, 타인들의 부러움이라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재수 없다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니었다. 부럽다는 말을 대신해서 쓰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부럽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답게 살고 있다는 말이라고 생각하니, 듣고 싶어 졌고, 재수 없게 살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재수 없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있다는 뜻이 될 테니 말이다. 그저 내가 재수가 없어지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하면서 질투하는 것은 나에게 투자해야 할 시간을 남에게 쏟고 있다는 소리이고, 남의 생활을 맞추어보려고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재수 없는 삶은 누구나 살 수 있다.

 

 하루의 일기 같았다. 재수 없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커피 마시는 모습이 너무나도 여유로워 보이는 것이 재수 없어 보일 수 있다. 회사에서 힘들게 일하다가 커피 수혈이 필요하여 카페로 달려갔을 때. 평일 오후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참으로 부러웠다. 다들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또는 돈을 안 벌어도 될 만한 여력이 있어서, 평일 오후 한가하게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라고 부러워했다. 속된 말로는 재수 없어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재수 없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사람들마다의 속사정은 다를 것이다. 하나하나의 속사정은 나도 모른다. 하지만, 보이는 그 모습 속에서 내 상상이 더해져서 그들은 행복하게 사는 사람으로 생각되었고, 부러워하면서 선망이 되기도 했다. 하루는 연차를 쓰고 카페에 앉아서 책을 읽고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테이크아웃을 하며 기다리는 회사원들은 나를 보며 부러워했다. 같은 사정들이었다. 재수 없는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요거트 뚜껑에 묻은 요거트를 핥지 않고 버리겠다. 버린다.라는 말을 들으면 놀래면서 부러워도 하고 재수 없다고도 한다. 실제로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작은 위트에서 누군가에게 재수 없는 삶이 살 수는 것이다. 재수 없는 삶은 멀지 않다. 그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작은 반란 같기도 하고, 일탈 같기도 하다. 작은 반란과 일탈이 모이고 모여서 나의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기도 하고 행복하게도 하고, 나의 삶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재수 없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가장 나다운 것일 수 있다.

타인이 나를 부러워하는 뒤틀린 표현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뒤틀린 표현일지라도, 내가 잘못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내가 부러울 뿐이다.


누군가에게 부러움을 받는 나는 또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부러워한다는 것은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그러니까 재수 없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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