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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근 Aug 18. 2022

흉내내기

*본 글은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적어 본 초단편 소설입니다.




'엉덩이가 깨끗한 기린을 만나기'

 

  사무실 책상에 앉아 업무 달력을 넘기던 윤희는 나연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이번 설 명절 연휴에 연차를 두 개만 쓰면 9일의 휴가가 생기는군. 어차피 명절에 친척들을 만나봐야 왜 아직 시집을 안 가냐는 채근을 들을 뿐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대학가라, 대학생 때는 취업하라, 직장인이 되니 시집가라, 그 많은 잔소리를 피해 윤희는 어딘가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여름휴가 때 나연이 가고 싶다고 했던 나라들의 이름을 쭉 떠올려 봤다. 주변의 눈을 피해 키보드의 알트와 시프트를 연신 눌러대며 블로그 여행기와 항공편을 검색했다.


  마침 나연이 회사 욕을 하는 문자를 보내오던 참이었다. "우리에게도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할 명분은 있어야 하니까 시원하게 카드 빚을 질러 버릴까? 이참에 네 버킷리스트도 같이 이뤄보고." 윤희는 나연을 혹하게 하는 데 소질이 있었다. 나연은 매년 여름마다 휴가를 같이 보내던 윤희와 함께라면 오지여행도 괜찮을 거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인플루언서를 꿈꾸는 나연에게 아프리카 여행은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개인 사진전을 열 정도로 사진에 진심인 윤희가 나연의 그럴듯한 인생 샷을 찍어 줄 것임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해외여행에 나름 잔뼈가 굵은 나연과 윤희였지만 아프리카 대륙에 발을 딛는 건 처음이었다. 카타르 공항을 경유할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탄자니아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뜨거운 공기만큼이나 후끈 달아오르는 당혹감을 숨기느라 애를 썼다. 한국의 어느 시골 마을버스터미널 보다 낙후된 공항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한 나라의 국제공항이 이렇게도 열악할 수 있을까. 안전한 여행을 위해 미리 예약한 운전기사가 마중을 나왔다. (현지 운전기사가 없으면 세렝게티 국립공원에 들어갈 수 없는 법규가 있기도 했다.) 영어로 윤희와 나연의 이름을 적어 놓은 피켓의 스펠링이 몽땅 틀려 하마터면 국제 미아가 될 뻔했다.


  운전기사는 자신의 이름을 여덟 번이나 알려줬지만 두 한국인이 여덟 음절이 넘는 생소한 발음을 어려워하는 바람에 두 손과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콜 미 제이슨" 간단한 통성명을 나눈 다음 제이슨은 숙소가 있는 방향으로 차량을 운전하며 투어 일정에 대해 설명했다. 제이슨은 아루샤에서 시작해 응고롱고로 분화구와 세렝게티 국립공원 일정에만 함께 하며 투어가 끝난 후 잔지바르 일정은 자율로 진행된다고 했다. 국립공원 투어는 내일부터 시작되므로 첫날은 아루샤에서 자유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자유시간에 지켜야 할 유의사항은 단 한 가지, 호텔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윤희와 나연은 의아했지만 제이슨의 지프에서 내려 호텔까지 걸어가는 150미터 동안 아이들이 주변을 메워 싸는 것을 보고 단번에 이해했다. 아이들은 '원 달라'를 외치며 윤희와 나연의 옷과 가방을 잡아당겼다. 윤희와 나연이 토끼 눈으로 멍한 표정을 짓고 반응하지 않자 아이들은 머리카락을 당기기도, 침을 뱉기도, 돌을 던지기도 했다. 제이슨은 단호한 목소리로 윤희와 나연이 알아들을 수 없는 스와힐리어를 뱉었다. 아이들은 금세 뿔뿔이 흩어졌다. 


  윤희와 나연은 제이슨의 말대로 오늘 하루는 장거리 이동의 여독을 풀 겸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호텔 안은 밖이랑 너무 다르네. 인터넷에서 봤는데 여기는 물을 조심해야 된대. 병에 밀봉된 물이 아니면 절대 사 먹지 말라는 거야. 가짜 물을 병에 담아 파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대."

"윤희야, 그런데 아까 신발 안 신고 있는 애들 봤어? 월드비전 후원을 끊어 버린 게 후회돼"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 한다잖아. 우리에겐 우리의 세상이 있고, 쟤들은 그들만의 세상이 있는 거야."

나연은 말없이 병에 든 물을 따랐다. 윤희는 모든 걸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이따금씩 축축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가볍게 만드는 윤희가 싫지 않았다.






  운전기사 겸 가이드 제이슨, 요리사, 윤희, 나연, 독일 여자, 미국인 부부와 함께 지프차에 올라탔다. 지프의 최대 정원인 7명이 한 팀이 되어 세계 최대 규모의 국립공원 세렝게티와 응고롱고로 국립공원 3박 4일의 여정을 함께 하게 될 것이다. 매표소에서 제이슨이 입장권을 구매하는 동안 윤희와 나연은 벤치에 앉아 생경한 아프리카 대륙의 자연에 감탄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토질과 다르게 철분이 많이 섞여 붉은색을 띠는 흙은 마치 클레이코트로 유명한 프랑스 롤랑가로스의 테니스 경기장을 떠올리게 했다. 벤치 주변에는 개미핥기를 닮은 정체불명의 동물과 진분홍의 커다란 새가 꾸어억 꾸어억 킁킁 괴상한 소리를 내며 여행자들이 버린 과자봉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세렝게티 초원에 들어온 뒤로 여행자들은 마치 가상현실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시감이 들기도 했다. 시속 30km의 속도로 한참을 달리는 동안 쉬지 않고 수 만 마리의 야생동물들이 허블 망원경에 찍힌 광활한 우주의 별처럼 흩어져 있었다. 세렝게티에서 가장 보기 어려운 동물 BIG 5(사자, 표범, 코끼리, 코뿔소, 버펄로) 보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지구의 모습이 원래 이랬었다고 알려주는 듯한 야생동물의 생태였다. 다른 동물에 비해 시야가 좁아 서로 목덜미를 맞댄 채 보초를 서는 어미 얼룩말, 구부러진 뿔이 달린 검은 소, 피부가 약해 물속에서 돌처럼 등만 드러낸 하마, 하늘색 생식기가 달린 원숭이, 주토피아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가젤이 포식자를 피해 달리기 중인 장면, 호수를 둘러싼 수 천 마리의 홍학이 물을 마시거나 날아오르는 장면. 윤희와 나연을 포함한 이방인들은 지프의 열린 뚜껑 위로 머리를 낸 채 숨소리를 죽인 채 수 대자연을 바라보았다. 게임 드라이브를 하는 경유차의 덜덜거리는 엔진 소리와 카메라 셔터음만 들릴 뿐이었다. 





  와르르. 오랜 시간 쌓아 올린 관계를 무너뜨리는 데는 작은 모래알 하나로 충분했다. 


  마사이 부족이 사는 마을에 다녀와 응고롱고로 국립공원으로 넘어가기 전 날이었다. 여행경비를 아끼고자 선택한 텐트 생활과 계속되는 현지식에 피로감의 모래성이 쌓여 가고 있었다. 윤희가 아침 샤워를 위해 캠프 가운데를 지르는데 쓰레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제이슨은 하이에나 떼가 간밤에 캠프를 뒤진 것 같다고 했다. 게다가 텐트 주변에는 전 날에는 보지 못한 코끼리 똥이 발견되었다. 윤희는 나연에게 우리가 하마터면 코끼리에 밟혀 죽을 뻔했다며 깔깔깔 웃었다. 평소 쫄쫄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겁이 많은 나연은 캠프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어젯밤 샤워장에서 만났던 빨간 눈을 한 하얀색 도마뱀이 자꾸만 떠오르기도 했다.


  낯선 환경 탓인지 똥독이 올라 노란 얼굴을 한 나연과 달리 윤희는 그런 것쯤 아무 상관없다는 듯 캠프 생활에 적응했다. 별명 만들기가 취미인 윤희는 나연의 성이 황 씨인 것이 화장실을 못 갈 때마다 얼굴이 누렇게 뜨는 이유 때문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누를 황, 나연! 오늘은 화장실 갔나? 나는 오늘도 쾌변 했지 우하하"

"얘는 왜 갑분싸(갑자기 분뇨를 싸지른 얘기) 하고 난리야. 그런데 우리 어제 젖은 땅에 떨어뜨려서 휴지 없잖아."

"휴지는 없어도 물티슈가 있잖아."

나연은 쓰레기를 모으던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여기다 버려."

"뭘? 닦은 물티슈를? 더럽게 왜 그걸 들고 나와. 그냥 거기 바닥에 버렸는데?"

"왜? 제이슨이 쓰레기는 무조건 모으라 했잖아. 저기 안내문에도 적혀있고. 물티슈는 플라스틱이라 분해도 안되는데 아무 데나 버리면 어떡해."


  윤희는 융통성 없는 나연에게 농담에 진심을 반쯤 섞어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아주 환경운동가가 납셨다는 둥, 환경을 그렇게 생각하는 너는 샴푸, 치약 대신 소금을 챙겨 왔냐는 둥. 나연의 얼굴에 점점 싸늘한 그늘이 드리우더니 윤희를 내버려 두고 텐트로 들어가 버렸다. 윤희는 나연을 따라가며 뒤통수에다 대고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놈의 회피하는 성격 또 시작이다. 할 말 있으면 시원하게 하면 되잖아. 그동안 말은 안 했는데 솔직히 니 비건 지향이라고 하면서 SNS에 고기 먹는 사진 안 올리는 거도 웃기다고 생각해."

"야, 김윤희. 물티슈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무슨 뚱딴지 소린데? 그리고 내가 고기 사진 안 올리는 거는 비건인 팔로워들이 보기에 불편할까 봐 그런 거잖아. 너는 과학고씩이나 나와서 물티슈 안 썩는 것도 모르냐."

"그러는 너는 고등학교 때 문과 나와서 그렇게 윤리적인 척 따지나 보네. 물티슈도 언젠가는 썩겠지. 물티슈 버린 거 하나 가지고 이 넓은 지구에 아무런 영향도 안 끼쳐. 그리고 이 멀리까지 비행기 탈 돈 있었으면 월드비전 후원이나 계속하지 그랬냐."






  응고롱고로를 가르는 지프차에 안, 적막의 답답한 공기가 가득 몸을 짓눌렀다. 윤희는 다른 사람의 불편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기분을 드러내는 나연이 거슬렸지만 티 내지 않았다. 어제부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을 하면 할수록 나연의 냉랭한 온도만 짙어질 뿐이었다. 나연은 매번 갈등을 진지하게 해결하려기 보단 어물쩡 넘어가는 윤희의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윤희는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자신의 노력을 무시하고 매번 진지한 나연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사파리 투어가 끝나고 제이슨은 잔지바르로 이동해야 하는 윤희와 나연을 공항까지 배웅했다. 그동안 수고한 제이슨에게 팁을 얼마나 주는 게 좋을지 이야기하면서 어색한 분위기는 차츰 옅어져 갔다. 잔지바르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그들은 샤워가 급했다. 아무래도 수압이 약하고 널빤지로 엉성하게 지어진 캠프 샤워장에서는 충분한 샤워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윤희는 '좋은 게 좋은 거'라던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나연에게 샤워 순서를 양보했다. 나연은 동방예의지국의 예를 다하여 여러 번 거절하는 척을 하다가 먼저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탄자니아에 와서 처음으로 따뜻물에 한 샤워는 그들의 마음까지도 녹이기에 충분했다. 샤워를 끝내고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테라스에 앉으니 매 숨마다 온 몸이 상쾌함으로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쾌적하고 따뜻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아래 마음이 말랑해진 나연은 윤희에게 화해를 청했다. 내가 말이 심했다느니, 나도 잘 한 건 하나도 없다느니, 다음에는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옆에 있는 사람을 유령 취급하진 않겠다느니. 지극히 스테레오 타입의 사과와 용서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엉켜있던 마음이 완전히 풀린 듯했다. 적어도 다음 해 여름휴가가 오기 전 까지는 말이다.


  나연은 사업장 신규 발령으로 인해 바쁜 일이 많이 생겼다고, 윤희는 이번 여름휴가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야 할 것 같다고. 눈에 뻔히 보이는 핑계에 대해 일부러 속아주면서 그럴 수 있다고 괜찮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그들의 인생은 서로에게서 조금씩 점점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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