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활을 할 때였나. 그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즈음 할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삐쳐 있으셨다. 하루는 평소와 같이 노란색 장판 위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는데, 평소와 다르게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점심에는 고봉으로 담은 밥도 반도 안 드셨다. 이상했다. 삼촌과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거라 하셨다. 마을에서도 온화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우리 할아버지의 토라진 모습을 보게 되다니. 그 모습이 어린아이 같아서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왜 저래?"
"몰라, 느그 할아부지 한테 물어봐라."
"삼촌, 할아버지 무슨 일 있나?"
"에휴... 니가 할아버지랑 이야기를 좀 해보는 게 좋겠는데..."
뭐지. 나만 모르는 건가? 아무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자 나는 텔레비전 소리가 크게 들리고 있던 방의 문지방을 넘었다. 가지런한 나무 문살이 움직이며 삐그덕 소리를 냈다. 할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물었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어서 알려 달라고 할아버지에게 매달리고 보챘을 텐데 그날은 왠지 할아버지의 시간을 기다려줘야 할 것 같았다. 길고 긴 침묵 끝에 할아버지는 리모컨의 빨간 전원 버튼을 꾹 누르고 텔레비전에서 눈을 뗐다. 얼마간의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할아버지는 마치 고자질을 하는 아이처럼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할아버지는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밟지 못했다. 어려운 형편에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힘들게 살아온 이야기부터 요즘 유행하는 노래 가사 중에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가사가 있다는 말까지. 이런 이야기를 왜 갑자기 하냐 싶었지만 어렵게 말문을 연 할아버지의 입을 막고 싶지 않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마침내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두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뭐라고?"
"운전면허를 따고 싶은데, 느그 삼촌들이 다 반대한다 아이가. 느그 할머니도 다 한편이라."
"할아버지가 공부한다는데 자식들이 무슨 상관이고. 고마 해삐면 되지."
"내가 나이가 많다고 사고 날까 못 하그로 한다이가. 갱운기 타고 댕기는건 암 말도 안 하면서. 차가 갱운기보다 훨씬 안전한데"
"으이그. 삼촌들은 차 사달라고 할까 봐 그런 거 아이가? 내가 차는 못 사줘도 운전면허 필기 문제집은 사줄게!! 내가 할아버지 응원한다이가.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 진짜 멋있다."
할아버지의 머리맡에는 항상 문제집이 놓여있었다. 문제집을 펼쳐 보았더니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까만 볼펜 똥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고, 안 그래도 얇은 종잇장이 더욱 얇게 파스락거렸다.
"우와. 할아버지 공부 진짜 많이 했네? 바로 붙을 거 같다."
"아이다. 엊그제 하동 가서 시험 쳤는데 떨어져뿌써."
"시험을 벌써 칬다고? 이리 열심히 했는데 왜 떨어졌노? 우리 할아버지 똑똑한 거 내가 잘 아는데."
"내용이야 다 아는 내용이지. 그런데 나(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글자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문제를 끝까지 못 풀어보고 고마 떨지 삔 거라."
"맞나. 그러면 문제 빨리 읽는 연습을 해야 되나? 그거는 시간 오래 걸릴 긴데?"
"시험 치는데 가서 항의를 했다이가. 다 아는 내용인데 글자를 빨리 못 읽어서 떨어졌다고. 무신 방법이 없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몸이 불편한 새럼(사람)들이 응시하는 그런 게 있다는기라. 시간도 1.5배 더 주고, 문제도 읽어준다 하대. 그래서 다음 시험은 그걸로 접수해놓고 왔다."
할아버지는 2번의 필기시험과 1번의 실기시험을 치르고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했다. 그 해 할아버지의 나이는 78세였는데, 하동군에서는 최고령의 나이에 운전면허에 합격했다며 관련자들이 너도 나도 축하인사를 건네었다고 한다. 삼촌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작은 중고차를 구입해드렸다. 할아버지가 자동차 금액보다 더 큰돈을 보태라며 삼촌들에게 주시긴 했지만. 그렇게 할아버지의 도전을 반대하던 할머니는 이제 경운기는 불편해서 못 탄다며 소녀처럼 웃으셨고, 운전을 하는 내내 할아버지는 할머니보다 더 많이 웃으셨다. 할아버지의 애창곡과 함께.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운전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 할아버지는 2년 간 열심히 낡은 은색 자동차를 몰고 다니셨다. 가끔 내가 시골에 가면 버스터미널까지 태워다 주시기도 하곤 했는데, 중앙선 침범으로 접촉사고를 낸 이후 바로 차를 파셨다. 접촉사고 피해자였던 택시기사양반이 합의금으로 입이 쩍 벌어질 만큼의 액수를 요구했고, 할아버지는 자식들 걱정시킬까 봐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해결하셨다고 한다. 자동차와 이별한 뒤 2박 3일을 식음을 전폐하시며 끙끙 앓던 할아버지는 돌연 네발 오토바이(A.K.A. ATV)를 구입하셨고, 다시 신나게 전통시장과 마을을 누비고 계신다. 다음 달이면 92번째 생일을 맞으실 할아버지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운전을 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