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 근처에는 철거 대상이었던 조그만 집에 알록달록 벽화가 그려지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관광명소가 있다. 아이들은 벽화 마을보다 높은 언덕을 거북이처럼 느리게 걸어 교문을 통과한다. 영양교사인 나를 포함한 급식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시계는 빠르게 시작된다.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등교 시간보다 빨리 식재료 검수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급식소에 출근하는 교직원들과 마주치는 아이들이 꽤 있다. 학교에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물어보면 아이들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한다. “집에 아무도 없어서 빨리 학교 오는 게 나아요.”
급식소의 점심시간은 시끄럽다. 주방 후드가 돌아가는 소리, 스테인리스 식판과 수저가 부딪히는 소리, 배식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특히나 배식대 안 주방에서는 식당에 서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기 힘들다. 높은 데시벨 가운데 차라리 못 듣고 지나쳤다면 어땠을까 싶었던 하루가 있다.
“선생님,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유주(가명) 머리 좀 보라고. 요새도 머리에 이가 있다.”
“아...”
“야는 항상 추즙게 대인다. 엄마가 없어서 그렇다. 샘도 알잖아 우리 학교 애들 상황.”
순간 어린 시절 날더러 옷이 더럽고 냄새가 난다고 하던 선생님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입버릇처럼 엄마 손을 덜 탄 애들은 티가 난다고 말했다. 나와 같은 상처를 받는 아이가 없으면 했는데... 혹시 유주가 들은 건 아닐까 눈치를 살폈다. 유주는 작은 두 손으로 스테인리스 식판을 잡고 배식대를 응시한 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좋아하는 반찬이나 후식을 더 달라고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 구김살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명랑한 아이였다. 나는 유주와 유주의 담임선생님의 배식 순서가 지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끄럽다고만 표현하기엔 복잡한 기분이 마음을 짓눌렀다. ‘그래도 나는 저 선생님과 달라. 아이들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진 않잖아.’ 불편한 마음을 말라붙은 잔반을 비워내듯 털어내야 했다.
그 이후에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일거라 생각했다. 차별과 배제의 언어를 사용하는 동료교사들을 보면 문제 의식을 가졌고, 그들과 다르게 행동하리라 마음 먹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간의 자부심이 오만이고 착각임을 깨닫게 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생님 선생님! 콩나물밥 완전 극혐! 치즈 돈까스 해주면 안 돼요?”
“선생님은 편식 극혐! 치즈 돈까스는 다음 달 메뉴에 넣어 놓을게”
이와 같은 대화가 아이들에겐 한 번이지만, 나는 한 반에 한 명만 있어도 하루에 20번은 된다. 비슷한 대화가 반복되다 보면 처음엔 웃으며 답하던 내 마음의 온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안 되는 이유를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같은 말을 반복하는 아이를 보면 마음 속 퓨즈가 쉽게 끊어지기도 한다.
“선생님! 스시 해주세요.”
“저번에도 이야기 했듯이 너희들 배탈날까봐 익히지 않은 음식은 급식에 못 주게 되어있어.”
“그러면 간장게장 해주세요”
“민기야(가명), 게장도 안 익은 음식인데? 나 말고 너네 엄마한테 해달라 그래.”
“저 엄마 없는데요?”
“뭐?”
“헤헷. 뻥이에요. 미안하면 다음 달에 스시 해주세요.”
민기의 거짓말은 마음 속에 ‘뻥’하며 강력한 폭발음을 남겼다. 만약 민기에게 정말 엄마가 없었다면? 엄마가 있어도 자녀를 챙기지 못할 사정이 있다면? (내가 뱉은 말의 화살이 아이의 마음에 명중해서 평생 상처로 남았을 것 같다.) 게다가 가정에서 양육의 주체가 꼭 엄마여야 된다는 편견을 아이에게 재생산하는데 기여했다면? 그것도 교육의 장인 학교에서! (세상이 아주 느리게 바뀌는데 동조했으리라.) 어쩌면 민기는 내가 해선 안 될 말을 했다는 것을 미리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장난을 통해 반영된 실언을 돌이켜보면 아찔하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굴레는 씌우고 불쌍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집요한 어른들이 있고, 정상 가족이라는 틀로 자율적 존재를 가두거나 배제하는 닫힌 사회가 있을 뿐이다.”(다가오는말들, 은유, 163쪽)
나는 불쌍한 아이를 만드는 이상한 어른이다. 차별과 배제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기존의 가치관을 답습하는 관습적인 말 또한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 아이가 자라는 환경을 바꿔줄 순 없지만, 아이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노력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평소에 어떤 말을 써왔는지 돌이켜본다. "보호자.. 학부모라는 단어 대신에 보호자.." 아직은 어색한 단어를 익숙해질 때 까지 연습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