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애착의 대상이 된 당신에게
엄마, 유치원생이던 나, 그리고 이모. 우리는 개소주를 짜던 건강원의 2층 구석 셋방에서 함께 살았다. 이모는 비슷한 외모만큼이나 남편 복이 없는 팔자까지 제 언니를 닮았다. 엄마는 내가 세 살 때 남편이 다른 여자와 맨몸으로 이불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이모는 나와 동갑인 딸이 세 살 때 도박과 폭력을 일삼던 남편을 피해 홀로 집을 나왔다.
이모는 늦은 밤 집에 오면 자고 있던 나를 깨우거나 놀리는 날이 많았다. 약이 바짝 오른 나는 눈알이 아플 때까지 이모를 째려보거나 으앙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때마다 이모는 깔깔깔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나는 이모를 마녀라고 불렀다. 마녀와 가끔 휴전을 하고 팀워크를 발휘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번데기였다. 이모가 직장에 가지 않던 주말이면 함께 시장에 나가 번데기를 사 먹고, 남은 것은 일부러 냉장고 한복판에 두었다. 벌레라면 기겁을 하던 엄마가 놀라서 으악 소리를 지르면 우리는 두 손을 부딪히며 함께 깔깔깔 웃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나는 할머니집으로 보내졌다. 한 달에 한 번씩 엄마가 시골에 왔고, 이모도 가끔 함께 왔다. 생일을 앞둔 나는 갖고 싶던 강아지 인형의 모양을 설명했다. 그러나 선물로 받은 인형은 원하던 것이 아니였다. ‘거봐, 내가 말한 게 나영이가 갖고 싶던 거잖아.’ 엄마와 함께 인형을 고르러 갔던 이모가 으쓱했다. 과연 번데기로 다져진 우정은 빛났다.
이모는 엄마와 나의 감정 쓰레기통이기도 했다. 엄마의 불치병이 재발해서 잠시 함께 살게 되었을 때, 하루가 멀다 하고 이모의 전화는 불이 났다. 엄마는 사춘기가 온 내가 말을 안 듣는다고, 나는 엄마가 내 마음을 전혀 모른다고 하소연했다. 엄마는 내가 엄마에게 던지는 퉁명스럽고 짜증내는 말투와 이모 전화가 왔을 때 하이톤의 애교 섞인 목소리를 비교하고 흉내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모는 웃어넘기거나 말을 아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딸을 두고 집을 나와 홀로 사는 이모가 두 모녀가 쏟아내는 감정의 찌꺼기를 받아내는 일이 쉽진 않았으리라.
이모는 나의 엄마이기를 자처했다. 수능을 두 달 남기고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장례 절차를 밟은 것도, 별거 중이던 아빠가 법적 보호자란 이유로 가져가 버린 조의금과 보증금을 악착같이 받아 낸 것도 이모였다. 미성년을 벗어나면 보호자가 필요 없을거라 생각했지만 나는 습관처럼 이모를 찾았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아빠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이복동생을 내게 맡기려 했을 때도, 축의금 문제로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혼주 자리에 서지 않겠다고 악다구니를 칠 때도 나를 지켰다. 이모와 나는 아귀가 맞는 퍼즐이었다. 딸이 있지만 없던 이모와 아빠가 남았지만 보호자가 없던 나.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의 연대라기엔 지나치게 처절하고 끈끈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화번호부에 저장되어 있던 ‘이여사’라는 별칭은 어느새 이모의 것이 되었다.
이모는 내게 ‘든든한 버팀목’이자 ‘베스트 프랜드’이기도 했지만 ‘가장 상처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20대 중반이 된 나는 심각한 불면증과 과호흡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그 사실을 안 이모는 얼마나 한가하면 우울증이 오냐고, 본인처럼 인생이 혹독하면 그런 생각할 시간도 없다고 했다. 병원 기록이 사회적 낙인으로 남아 취직도 못하고 시집도 못 갈 거라는 예언까지. 이모의 말은 비난이었을까 걱정이었을까. 나는 둘 다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약해빠진 정신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느냐는 충고 속에 담긴 당신 또한 절대 무너지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도 남들도 다 하는 형식적인 위로조차 하지 않는 이모가 미웠다. 나는 한마디만 더 하면 여기서 뛰어 내리겠다고 소리치며 울었다. 그러면 이모는 지지 않고 말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니 아주 복에 겨웠구나.”
이모에게 해주고 싶은 일도 있었다. 이모와 사촌(이모딸)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 나는 시간만 나면 셋이서 만날 자리를 만들고, 그 자리에서 빠지는 날을 늘려갔다. 그동안 쌓인 시간의 공백을 온전히 채울 순 없겠지만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들을 보며 행복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허전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모르는 모녀의 이야기들이 생기며 소외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긴, 이게 당연한 거지. 내가 이모의 딸이 아닌데 서운함을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 나는 마음속에서 이모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연락을 줄이고 결혼생활에 집중했다.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나니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날 딸과 다툰 이모가 전화로 하소연을 시작했다. 나는 사촌이 최근에 내게 한 잘못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며 나쁘게 말했다. 이모는 딸이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닌데 본인이 필요할 때 있어 주지 못해 이기적으로 자랐을거라고 자책하며 내가 먼저 이해하라고 했다. 감정에 북받친 나는 “딸이라고 편든다”며 이모까지 비난했다. 이모는 울먹이며 “나는 너희 둘을 단 한번도 다르게 생각한 적 없다”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 역시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몇 달 뒤 원인불명의 혈복강으로 응급실에 실려갔고, 난관파열이 의심되어 복강경 수술을 해야 했다. 온 몸이 가스통으로 아프고 혈액부족으로 앉아만 있어도 숨이 찼다. 식사 정리는 물론 용변을 보는 것 조차 혼자 하기 어려웠는데, 남편이 더 이상 회사를 비울 수 없었다. 고민끝에 이모를 찾았다. 이모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본인은 바쁘니 시어머니를 부르라 하곤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아랫도리에서 피가 오줌처럼 흐르는데 어떻게 시모의 간병을 받는단 말인가. 앞이 막막해 눈물이 줄줄 흘렀다. 얼마 후 남편을 통해 이모가 두 시간 뒤에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모는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8시간 넘게 추위에 떨다가다 새벽 4시를 넘겨 병실에 들어왔다. 피곤하다는 짜증과 함께.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바쁘다면서 그렇게 성질 낼 거면 왜 왔냐며 차갑게 굴었다. 이모는 “니가 나 말고 보호자가 어딨냐”며, 다시는 안 보려 했는데 네가 아파서 어쩔 수 없었다며 그동안 쌓인 말을 털어 냈다. 나는 ‘이모가 아무리 딸보다 니가 편해도 조카보단 딸이 좋은 거’라던 할머니의 말이 자꾸 생각나고 서운해 이모의 마음을 오해했다고 사과했다. 우리는 멀찌감치 떨어져 한참을 울었다.
이모가 병원에서 며칠을 보내고 돌아가는 날, 다음에 이모가 아프면 내가 보호자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모는 간병인 보험을 들었으니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아니, 딸이 둘이나 있다면서 그딴 건 왜 들어?” 이모는 혀를 차며 이제 나이도 찼으니 말하는 싸가지를 정돈하라 했다. 언제는 철이 없어 그렇지 속은 깊은 애라더니, 툭하면 말뽄새가 인정머리 없는 게 꼭 하씨 종자를 닮았다고 한다. 질 수 없는 나는 새로운 대답을 장전한다. 똑같은 할머니 배에서 나온 이모나 내가 얼마나 다르겠냐고. 게다가 보고 배운 건 키워준 이씨 집안으로부터 온거라고.
이모와 나는 서로 부딪혔다 하면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심벌즈를 닮았다. 우리의 연주는 서툴러서 박자도 엉망진창인데다 기본적인 강약조절도 어렵다. 우리가 투닥거릴때마다 할머니는 ‘또 시작했다’고 하고, 할아버지는 ‘둘이 똑같다’ 하고, 남편은 ‘제발 좀 그만하라’ 말린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시끄러운 소리를 낼 것 같은 이 불협화음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