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TV와 게임, 핸드폰보다 더할 나위 없이 자극적이고 짜릿한 건 없어서. 거제에 갈 때마다 난 그 네모난 것들 앞에서 한껏 예민해졌다. 거제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자연 속에서 유익했으면 하던 엄마의 바람은, 아이들에게 성가신 잔소리가 되어 공허하게 빈 메아리로 울렸다. 자연도 훌륭했지만 거제엔 거대한 사이즈의 TV, 최신형 게임기, 우리 집에선 좀처럼 쥐어지지 않는 핸드폰도 있었다. 최첨단이었다. 아이들의 동공이 커졌고 집에선 없는 기회 앞에 탐심이 이글거렸다. 눈으로만 신호를 보내던 내 눈은 찌푸려졌다 흘겨졌고 입 모양으로만 아이들을 제어하려던 내 입은 더 우악스러워졌다.
자꾸만 모니터 속 세상 안에서 아드레날린을 분출하려는 아이들을 밖으로 꺼내야 했다.
(우리, 죽순 캐러 가자)
이래 봬도 거제는 맹종죽 국내 최대 생산지라는데...
거제에 한 달, 한 달 반 주기로 거의 7년 넘게 오갔던 우리에게 여전히 죽순은 생소한 단어였다. 그런데 갑자기 죽순을 캐러 가자고? 나에게 주어진 단서라곤 4월-6월 사이에 죽순이 제철이라는 팁뿐이었다. 거기에 정의감 비스름한 것이 억지로 더해졌다. 땅 주인도 모르게, 누군가 쌀 한 포대 넘는 분량의 죽순을 어기적 어기적 담아가더라는 제보가 있었다. 이른 새벽이나 야심한 밤에 몰래 와서... 죽순을 감싸고 있던 잎들만 무성하게 남기고 간 밤손님들.
더 이상, 얌체 죽순 사냥꾼에게 죽순을 빼길 수 없다!
하지만 8세의 머릿속에 딱히 단어가 그려지지도, 상상의 도마 위에 올려지지도 않았을 '죽순'이라는 단어. 그건 40세의 어휘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생경한 죽순이어라!
蘇東坡 《初食筍》
"嫩筍香如餌,春盤薦我庖。"
"부드러운 죽순은 향기롭고, 봄날 내 식탁에 올라오네."
송나라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시에서도 찬양되던 죽순이라 건만... 식당 메뉴에서나 봤을법한 죽순 무침은, 나에게 단 한 번도 군침을 삼키게 한 식재료가 아니었으니. 시큰둥했다.
호기롭게 아이들을 밖으로 나가자 이끌어, 집 바로 옆 언덕배기에 올랐다. 무성한 대나무들 사이에서, 숨은 죽순 찾기! 죽순은 대나무 품종 중 왕대(왕죽), 솜대(분죽), 죽순대(맹종죽)의 어린순을 통칭하는 거라는데... 대체 죽순은 어디에 있담.
막상 미지의 죽순을 찾아 숲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이들은 직접 게임 속 아이템 캐기에 나선 듯 신나서 대나무들 사이를 뛰 다니다시피 했다. 휙, 휙, 휙, 휙 대나무 사이를 넘나들다 땅을 뚫고 솟아난 의기의 죽순 찾기.
대나무 숲에, 난생처음 어린아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몰려들었다. 숲은 스샤샤샤 바람결에 청아한 댓잎 소리로 환영해 줬다. 바람이 스치는 자리마다 일제히 환호해 주는 양, 마음마저 상쾌하게 해 주던 소리. 푸르른 대나무 사이사이에서 아이들 웃음소리마저 더해져 숲이 경쾌해졌다. 대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와 음이온으로 몸마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죽순황독각 竹筍黃犢角. 죽순은 누런 송아지 뿔과 같다고 하던데 내 눈엔 잔털이 복슬복슬한 코끼리 뿔 같았다. 죽순 사냥꾼들이 한바탕 소리 소문 없이, 허락도 없이 휩쓸고 간 자리엔 여린 죽순 말고 대가 세찬 죽순들만이 몇 남았다. 원뿔 모양으로 솟아난 남은 죽순들은 아이 허벅지보다 더 굵어 보였다.
손도끼로 죽순 주변 흙을 파내어 죽순이 간당간당 서있는 정도가 되면 작은 채취꾼들을 불러 모았다.
(죽순 발견, 죽순 채취.
죽순 발견, 죽순 채취)
아이템 신호를 반짝반짝. 내 입으로 낸 경보음으로 연신 알림을 줬다.
심봤다....! 하는 느낌으로 땅 속의 죽순을 뽑아들며 기뻐하던 아이들. 딱딱한 밑동을 잘라낸 뒤 잔털로 가득한 겉잎을 걷어냈다. 곧이어 층층이 상아색의 죽순 속살이 드러나니 일제히 환호하는 모양새였다.
죽순 무침이나 삶은 죽순으로 식탁 위에서 마주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감이었다.
쌀 포대 안에 죽순을 욕심껏 담아와서 장작불을 지피고 가마솥에 넣고 삶았다. 상아색 빛깔이 더 영롱해졌다. 삶은 물을 차처럼 마시고 새초롬하게 무친 죽순 무침을 아삭거리며 먹었다.
빼꼼하게 솟은 아담한 죽순이 아니었어도 담백하고 부드러운 단 게 그야말로 건강한 맛이었다. 내 손으로 캔 거라 더 식이섬유 풍부하고, 몸에도 좋을 것만 같은 느낌에 욕심껏 죽순을 오물오물거렸다.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죽순 캐기 경험 한 번으로 죽순은 이제 죽순이 아니라 꽃이라도 된 것만 같은 기분. 이토록 즐거운 죽순이라니.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꽃에 불과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마음속에 그가 살아있듯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그에게로 가는 길이 되었다.
그가 나를 향해 꽃을 피운다면
내가 그에게 꽃을 불러주듯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꽃이 되기를 원한다.
꽃 대신 죽순. 이제 매년 4월-5월 즈음이 되면 죽순 캐러 대나무 숲을 누비던 어린 날의 난쟁이들이 생각나지 않을까. 게임이 쏘아 올린 공으로, 봄 한켠이 죽순으로 풍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