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란 3
소아정신과 의사인 오은영 박사님이 멘토링하는 <금쪽같은 내 새끼> 프로그램에 보면, 문제아라 여겨졌던 아이들을 혼자 두고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금쪽아 너는 소원이 뭐야??”
평소의 문제상황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는, 늘 말썽만 일으키는 것 같아 보이는 아이들이, 소원을 묻는 질문에 “엄마가 행복해지는 것, 엄마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대답을 한다. 자기 때문에 엄마가 늘 힘들어하더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 금쪽이의 말에 엄마들은 눈물을 터뜨린다.
부모님들은 자신들이 아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종종 누구의 사랑이 더 쎈가..하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이 세상 전부, 이 우주의 전부였다. 그런 분이 화를 내면 하늘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았고, 그런 두 분이 싸우면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것 같았다. 그분에게 나의 생사여부가 달려있기에 그분께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은 옵션이 아니라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빠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는 것은 모든 아이들의 으뜸가는 소원일 것이다. 그분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것도 나로 인해 행복해한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엔 엄마가 하자는 대로 했다. 엄마 하자는 대로 하면 엄마가 행복해할 줄 알았다. 그러다가 이 엄마라는 분을 만족시키기가 상당히 까다롭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만 하면 좋아하실 줄 알았더니 그런 목록이 백 가지나 더 있다. 공부 잘하면 좋아하실 줄 알았더니 전 과목을 다 잘해야 하고, 친구랑도 잘 지내야 하고, 몸에 안 좋다고 알려진 것은 먹지 말아야 한다. 연필도 똑바로 쥐어야 하고, 책을 보라고 했지만 누워서 보아서는 안된다, 눈 나빠지니까.
최선을 다해 엄마를 만족시켜 보려 했는데, 마음에 안 들어할 때까 더 많다. 엄마를 기쁘게, 행복하게 만들기는 불가능하구나.. 를 알게 된 어느 날, 반대방향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엄마는 나로 인해 행/불행이 결정되는 것처럼 그러더니,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걱정목록이 끝이 없고, 나의 작은 행동 하나에 희비가 수십 번씩 왔다갔다 한다. 결국 그분의 불행은 나로 인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속았다. 분노가 올라온다.
“당신의 불행은 내 책임이 아니야,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냐고..”
제발 나랑 상관없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가 괜찮은지 별일 없는지 살피는 그 더듬이 짓도 그만했으면 좋겠다. 다 괜찮아도, 괜찮지 않은 한 가지를 어떻게든 찾아내는 그 더듬이 말이다.
사실 아이들은 엄마를 만족시켜 줄 수 없다. 엄마는 아이를 마음에 안들어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못마땅해하고, 자기 자신이 마음에 안들고,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아이가 무슨 짓을 해도 이 엄마가 만족스러워하는 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
엄마가 엄마 자신을 보는 눈이 바뀌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볼 때, 존재 자체로 귀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충만해야 한다. 자기가 마음에 들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이들이 어떻게 하더라도 크게 영향받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공부를 잘해도 행복하고, 잘 못해도 행복하다. 아이에 의해 행불행이 좌우되지 않는다.
엄마는 나의 행동과 상관없이 늘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아이들은 그때부터 자기를 탐색하고, 이 세상을 탐색한다. 산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구나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엄마를 웃게 해 주길 원하는 아이를 좌절시키지 말아야 한다. “네가 무언가를 잘해서가 아니라 너의 존재 자체로 기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면 성공이다. 그것은 아이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느냐에 달린 것이다.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기준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남들이 제시한 기준을 나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아닌지 말이다.
남들이 부여한 기준을 다 철폐하고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제 아이들을 볼 때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엄마를 기쁘게 하길 원하는 아이를 좌절시키지 않는 비결은 아이들이 아닌, 나 자체로 만족스러워하는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