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봉 감독의 스크립터를 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감독이 신인이라 경력 있는 스크립터를 원해서 내가 제일 먼저 생각이 났다는 말과 함께..
델타 바이러스가 유행이지만 영화들은 슬슬 들어갈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한때는 그러한 말들을 칭찬으로 들었다.
어떤 창의력을 발휘해도 기회는 오지 않았다.
감독 뒤에서 존재를 드러내면 안 되는 그림자로서의 가치만 높아졌다.
그러는 동안 살림살이는 조금 나아졌다.
밥은 굶지 않았으니 감사해했다.
김훈의 말처럼 밥벌이는 지겨웠다.
내 꿈이 전문 스크립터는 아니었다.
감독 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니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감독이 꿈도 아니었던 것 같다.
잘한다는 칭찬에 익숙해져 정작 내 꿈이 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를 알아보기 위해 시간을 쓰지 않았다.
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해왔지만
난 지난 10년 간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쓰다가 불안해질 때쯤 일이 들어왔다.
밥벌이를 핑계로 늘 도망갔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그림자 속 심연에 갇혀서
평생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서 숨이 막혔다.
최근 몇 년간 입봉 감독의 뒤치다꺼리를 해달라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그들이 감독을 그렇게 대하면
다른 사람들도 감독을 그렇게 대한다.
그 감독을 바보로 만드는 입봉 대기 중인 조감독들과 제작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욕을 할 수도 없었고,
감독의 입장을 대변할 수도 없었다.
나라고 뭐 크게 달랐을까 싶었다.
정중하게 일을 거절했지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실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왜, 대체 뭤 때문에?
나는 실패를 해본 적이 없다.
실패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런 실패도 없으니까
그냥 그런 상태에서
잘할 거라는 기대감만 받으며
부족하다는 입봉 감독들의 흉을 보며
허영만 키웠다.
“내가 하면 더 잘할 것 같은데?”
죽도록 노력한 적도
무언가를 꺼내 놓은 적도
간절히 원한 적도 없이
남의 실패에 안도하고
남의 성공에 패배감만 키우는
용기 없는 XX
“아니, 그 입봉 감독은요.
누구는 끝끝내 완성하지도 못한 시나리오를 용기 있게 들이밀어
투자까지 받은 대단한 사람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