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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노비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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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인 Z Jun 25. 2021

세상에 원래 그런 건 없다.

원래라는 단어의 비겁함

대체 어느 시대를 기준으로 원래 그랬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인습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전통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누군가를 손쉽게 통제하고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해왔을 뿐이다.  


현대의 영화는 15분 내외에 서브 주제를 가진 10여 개의 시퀀스로 기승전결을 구성한다.

인간이 한 이야기에 물리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라는 통계의 결과이다.

초반 시퀀스의 15분 내외에 이야기의 설정과 캐릭터 설명을 끝내려고 노력을 한다.


잘 구성되었다는 유튜브의 콘텐츠들도 대략 15분 내외이다.

각 잡고 앉아서 보는 영화와 달리 가차 없이 꺼도 되는 환경이기 때문에 이렇게 발전된 것 같다.

요즘엔 초반 10-15초 내외에 영상의 하이라이트를 넣는 방식으로 나아가며 시청 유지 시간을 늘리려 노력을 한다.

유튜브 수익구조의 대부분이 클릭수에 의존하다 보니

최근의 영상들은 점점 질보단 낚시성의 제목과 자극적인 썸네일로 치장한 채 화제성 키워드를 따라가는 걸로 바뀌고 있다. 인터넷 뉴스판과 다를 바가 없는 구조로 가고 있다.


모든 창작의 형식이나 시스템에 원래 그런 건 없다.

산업의 요구에 맞게 최적화의 과정을 거칠 뿐이다.


더 이상의 혁신이나 투자 없이 가성비를 경쟁하다 시장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은데

범람하는 유튜브 영상이나 지금의 한국 영화판도 다를 바가 없다.  


1000만 관객이 들 수 있는 조건에 부합하는 영화나

20억대로 만들 수 있는 소규모 작품 위주로 기획이 되다 보니

영화가 하는 이야기가 점점 비슷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이야기의 길이와 시장을 정해 놓은 환경에서 오는 태생적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영화 시스템은 산업 최적화의 끝점에 와있다.


지금은 당연한 듯 여기는 현장 편집시스템은 영화 '친구'에서 처음 도입되었다.

투자가 되고 프로덕션 단계가 되면 5-10회 차 분량의 촬영본을 투자사에게 보낸다.

숙제 검사라고 표현하는 감독도 있고, 현장 편집기사에게 맡기고 신경 쓰지 않는 감독들도 있지만

대부분 촬영이 없는 휴차 기간에 없는 시간을 쪼개서 보고를 위한 잔업을 한다.

투자한 입장에서 감리가 꼭 필요하다면 그런 시간과 인력을 마련해주는 게 맞지만

그러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종종 감독이 바뀌기도 했다.

감독의 편의를 위해 생겨난 현장 편집이 다시 감독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 되었다.  

빡빡한 촬영 스케줄 속에 그 과정을 소화해내야 하지만 그에 따른 보상은 없다.

왜 시스템은 그 속에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발전이 아닌, 고혈을 짜내는 방식으로 발전하는가?


최근의 OTT 시장의 급성장으로 '포스터 프로덕션 슈퍼바이저'라는 직업이 생겨났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도 모른 채 제작사에서는 OTT 플랫폼의 요구에 따라 인력을 구하고 있다.

기존 시스템에서 투자사의 보고 의무를 책임지는 PS와 후반 스케줄을 관리하는 조감독의 역할이 혼재되어 있다고 이해되었지만 그들이 제시한 임금은 그에 부합하지 않았다.

최근에 제안받은 금액은 영화를 2-3편 정도 했을 때 해당되는 임금이었다.

일이 힘들지 않으니 임금은 많이 줄 수 없지만, 일을 잘하는 경력자가 와줬으면 좋다고 말했다.

산업의 변화의 흐름에서 내가 수락한 금액이 그 직업의 원래 가치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그 원래라는 이름에 부합할 선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충분히 부조리에 가담해왔으니 이젠 그만하고 싶다.  


마블 영화가 한국에서 처음 촬영할 때 수주를 따내기 위해 한국의 제작사들은 촬영 시간과 제작비를 말도 안 되게 책정을 하였고, 그게 관행이 되어버렸다. 한국은 갓 성비로 콘텐츠를 뽑아내는 국가가 되었다.


OTT시대에 넘겨야 할 손익분기점도 시청률도 눈앞에 없는 지금 이야기에 맞는 합리적인 예산과 인건비 책정이 정말 어려운지 묻고 싶다. 지금이야말로 제작사와 창작자들이 서로를 착취하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부재를 논하지만 그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않고 먹고살면서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려 노력했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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