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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인 Z Oct 23. 2021

알바의 마음

정확한 사랑의 실험

배운 게 도둑질이라 한 작곡가의 공연 촬영에 알바를 나갔다. 

아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공연에서 조명을 하기로 한 파트너를 보기 위해 그 일을 하기로 했다. 

공연이 있던 그날은 우리가 오랜만에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영상을 담당했던 이와도 아는 사이라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공연장에 갔다. 

일 때문에 약속을 일방적으로 미룬 파트너를 탓하지 않고 

함께하는 것에 의의를 둔 내가 조금은 관계에 있어서 더 나은 선택을 한 줄 알았다. 


당일에 콘티를 받고 카메라 동선과 앵글을 확인하는데 

알바의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촬영을 한다는 말에 원래 촬영을 하기로 했던 사람을 밀어냈음을 알게 되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REC 버튼만 누르면 된다고 착각했던 나의 마음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졌다. 

나의 안일함이 나의 무례함이 

내가 찍는 화면에 담겨있을까 봐 REC 버튼이 돌아가는 내내 미안했다.


그날의 공연은 작곡가가 자신이 지금껏 작곡한 곡들을 

사랑하는 동료들과 준비를 해서 지인들에게 보답의 의미로 초대로만 마련한 자리였다. 

곡명도 모르고 화면에 담기는 곡에 위로를 받았고, 

카메라의 앵글보다 관객의 관람 환경에 더 신경을 쓰는 이유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곡들 사이에 진행되었던 대담을 통해 예술가로 살아온 그의 삶의 모습들이 더 궁금해졌다. 

공연이 끝나고 장비 정리를 끝낸 내게 그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행여나 내 불손한 마음이 들킬까 봐 마지막 두 곡이 좋았다는 말로 그 자리를 모면하려 했다.  

그는 내 말에 공연 팸플릿을 챙겨 왔고, 

어차피 쓰레기가 될 거라는 생각에 받지 않으려 했지만 그런 내 두 손에 꼭 쥐어 주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팸플릿을 보았다. 

정성껏 작성한 글들을 읽어가며 예술을 대하는 그의 마음에 데인 기분이 들었다. 

제일 좋았던 곡명이 "Lightness"라는 걸 알았고,

대학 졸업작품으로 만든 그 곡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든 곡이었다. 

그 순간 내 존재가 너무 하찮고 가벼워 멍해졌다. 


밀란 쿤데라의 다른 작품인 <불멸>에 괴테를 사랑한 베티나의 이야기가 나온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불멸에 대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괴테의 이름에 기대어 자신 또한 역사에 불멸의 존재로 남고자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어쨌든 그녀는 괴테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베토벤과도 친분이 있었고 

괴테와 주고받은 다수의 편지를 책으로 남겨 역사의 불멸의 존재로 남게 되었다. 


영화산업 구조의 부당함이나 차별에 대해 갖은 글을 써댔지만 

타인의 삶에 기대고 싶어 했던 내 마음을 알아차린 순간 그곳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영화로부터 도망갔던 내 마음의 본질을 다시금 상기해준 순간이었다. 


인간이 성숙해지면 자신에 대한 성찰을 지나 타인에 대한 이해로 넘어간다고 하지만

나는 그 1차원적인 단계인 나의 욕망도 무시한 채 

타인의 삶을 전시하며 착취하는 선택을 하려 했다. 

늘 스스로를 공정하고 괜찮은 인간인 척했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매번 나를 괴롭히던 문제였다. 


카메라는 늘 대상을 필요로 하는 도구이다. 

피사체는 그 뒤에 선 자의 말에 따라야 하는 암묵적인 동의와 함께 권력관계가 형성이 된다. 

나는 매번 그 뒤에 숨는 선택을 했고, 끝끝내 나를 드러내는 걸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예술을 하는 줄 알았다. 

그날의 공연에서도 관람객들 때문에 제한되는 카메라 위치로 인해

더 좋은 화면을 담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공연 그 자체보다 내가 찍는 화면이 우선이었다. 

상업영화를 하면서 예술을 추구하지 않고 돈만 추구하는 이들을 대차게 까댔지만 

본질을 늘 잊어버렸던 건 나였다. 


결국에 삶의 일어나는 사건의 해석은 나의 몫이고, 

어느 날 돈이 간절한 때 들어오는 이러한 일은 

그저 그런 저시급의 알바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요즘의 내가 동요를 느끼는 지점의 대부분이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들인 걸 보면

이제는 내가 스스로를 드러내며 말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공연의 주제에서 답을 찾아보자면

나는 그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들을 사랑한 적이 없기에 

그것들을 착취한다는 느낌을 스스로 지울 수 없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내가 그 대상들을 사랑하지 않은 건 이해할 생각이 없었고,

그 이전에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노력들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모르는 인간이 타인을 이해할리가 없다. 

이해 없는 사랑은 없으며 

사랑이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행위는 타인에 대한 착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놓아 사랑을 외치는 까닭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만

너무 뻔해서 비웃고 싶어지는 마음 또한 여전히 가지고 있다. 

 

불편했던 걸 하나씩 도려내고 털어내다 보니 

정말로 볼품없이 작고 하찮은 나의 가벼움이 너무 적나라해서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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