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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지서강 Oct 22. 2020

‘진짜여자’보다 진짜 ’여자’ 같은 리얼돌

완전 변태 01



2017년 7월 20일, 인천세관이 리얼돌을 '풍속을 해치는 물품'으로 규정해 수입통관을 보류하며 ‘리얼돌 논쟁’이 시작되었다. 리얼돌 수입업자는 "개인의 성적 결정권에 국가가 간섭해 헌법상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반발해 소송을 냈고, 인천세관은 2018년 9월 인천지방법원에서의 1심에서 승소하였다. “리얼돌이 실제 여성의 신체 부위와 비슷하게 형상화되어 있고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왜곡하였다고 평가할 정도로 특정 성적 부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었다. 2019년 1월 대법원은 "성기구를 일반적인 성적 표현물인 음란물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2013년 헌법재판소 결정을 인용했다. 또한 "이런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에는 국가가 되도록 개입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실현하는 길이 된다"고 공적으로 판결하였다. 이 글을 작성하는 2019년 12월, 리얼돌 수입 반대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거울을 본 필자는 당혹스러웠다.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여성 친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바이/팬섹슈얼 젠더퀴어, ‘남자 같은’ 머리 스타일에 일부러 가슴이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는 나는 리얼돌처럼 생기지 않았다. 리얼돌이 ‘리얼’하다면, 리얼돌이 가지는 ‘리얼리티’는 어떤 성격의 것인가? 그것은 기술적descriptive ‘리얼리티’일 수 있다. 리얼돌이 실제의 여성을 상세하게 묘사하며 닮아 있기에 ‘리얼’하다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리얼돌을 닮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규범적 ‘리얼리티’일 수도 있다. 여성이라면 으레 가져야 할 특징들을 가졌기에 ‘리얼’하다고 부를 수 있다. 문화와 규범에 따르고 있기에 성적으로 인지 가능한 주체가 되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짧은 머리에 비밀스레 여성을 욕망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AI 리얼돌이라면 ‘리얼’돌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그것은 단지 물질적으로 실재하며 세계에 거주하고 있다는 존재론적 ‘리얼리티’일 수도 있다. 어쩌면 ‘여성’과 ‘남성’, 그리고 모든 ‘-성’들이 그렇듯 말이다.


리얼돌을 곧바로 ‘비정상적’, ‘변태적’으로 두고 인간여성과 인간남성의 평등한 성교를 정상적인 섹스이자 지향으로 두는 것은 어딘가 꺼림칙하다. 리얼돌은 ‘변태적’인가, 혹은 ‘정상적’인가?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중심사회에서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라면, 그것은 ‘정상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리얼돌은 사회적으로 공표된 관계 속의 인간 여성과 인간 남성의 성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변태적이다. 이 글은 오로지 리얼돌의 ‘변태성’만을 긍정하며, 오히려 더욱 ‘변태적’이라는 조건 하에 리얼돌을 긍정하고자 한다. 리얼돌이 나와 같은 ‘변태’라면 그를 꺼릴 것은 또 무엇인가?


1부 ‘여자’지만 ‘진짜여자’는 아닌 리얼돌

1) <리얼돌, 지배의 에로티시즘>

윤김지영 교수는 그의 논문 <리얼돌, 지배의 에로티시즘>에서 "1심에서 '사람의 존엄성'을 말할 때 말하는 사람은 여성을 가리키지만, 2심에서 성적 자유를 지닌 '개인'은 남성으로 한정된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여성이 사용하는 성인용품과 남성이 사용하는 리얼돌에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여성용 성인용품은 남성 신체의 완벽한 재현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여성이 기구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신체가 느끼는 것에 집중하고자 한다면, 리얼돌 등 남성용 성인용품은 여성의 신체를 지배하는 데 집중한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리얼돌이 불러일으키는 성적 자극의 본질은 "수동적이며 언제든 침해 가능한 여성 신체에 대한 장악 의지"라고 규정했으며 여성 신체가 남성들의 치료와 성욕 해소를 위한 도구적 존재로 형상화되는 것은 여성에게 심리적, 신체적 훼손과 인격침해를 유발한다고 진단한다. 이는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사회적 위치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의 논지를 확인해 보자. 첫째, 리얼돌은 여성을 재현한다. 그는 특별히 여성 ‘신체’의 형상화라고 표현한다. 외양의 ‘완벽한 재현’을 매개로 신체-여성과 사물-리얼돌은 같은 것이 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필자는 여성이나 리얼돌을 닮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자연적이며 자연’스러운’ 신체라는 개념이 전제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둘째, 여성과 리얼돌은 사회적 위치에 있어 등치 가능하다. 남성 입장에서는, 여성과 리얼돌을 같은 방식으로 대하게 된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리얼돌과 다르지 않게 다루어 질 위험에 처한다. 여성과 비슷한 모습을 가진 개별적 ‘신체’에 대한 대상화가 여성이라는 사회적 계층 전체로 확산된다. 이는 신체-섹스, 사회적-젠더라는 구도가 전제되어 있어야 가능한 논리적 전개일 듯하다.


셋째, 실제 여성과 리얼돌은 같지 않다. 리얼돌이 흉내내지 못하는 ‘실제 여성’은 존재한다. 리얼돌은 여성을 ‘완벽하게 재현’하지만, 그것에서 벗어난 ‘실제’ 여성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가진 AI 리얼돌의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시리야 오늘은 하고 싶니?”라고 물을 수 있다면 되는 것인가? 시리가 “오늘은 몸이 좀 안 좋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면 그걸로 끝일까? 넷째, 수동성, 지배의 관계로 이루어진 섹슈얼리티는 그릇되었다. 이제 그의 윤리적 지향점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자율적, 법적 주체로서의 여성이라는 범주이다. 자유주의의 담지자이자 자유 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정신’으로서의 여성 말이다. 여기에는 신체와 정신(즉, 법적, 사회적 주체)라는 구도가 전제되어 있는 듯하다. 그런데, 우리의 신체와 독립적인 정신적 실체가 존재하는가? 또, ‘신체’와 ‘정신’의 성별은 언제나 일치하는가? 다섯째, 위와 같은 관계를 만드는 가부장제 체계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이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 외의 다른 범주는 없는가? 가령, 리얼돌을 레즈비언/바이/퀴어 여성이 사용한다면? 클로짓 레즈비언들이 성적 쾌감을 얻고자 하는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다면 문제가 사라지는가? 도대체 나는 리얼돌과 같은가, 혹은 다른가? 리얼돌을 사용할 때 나는 대상화되는가, 아닌가?


윤김의 논의에서, 여성과 리얼돌은 같으나 같지 않다. 이때, 이 불일치는 자유로운 여성이라는 정치적 지향이라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해소된다. 이러한 주장은 안드레아 드워킨, 캐서린 맥키넌의 안티포르노 페미니즘 사상, 그리고 ‘PorNo’ 캠페인에서 사용되었던 논리와 닮아 있다.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이라는 슬로건을 대표로 하여 이루어진 이 운동은 남성 섹슈얼리티를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라고 비판하며 포르노에서 재현된 수동적 여성상은 실제 여성의 인권을 저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내적으로 일관적이며 대립적 범주로 구성된 여성-남성이라는 젠더의 구도로는 놓치게 되는 것이 존재한다.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소위 ‘퀴어 이론’과 해당 흐름에서 제기된 ‘교차성’, ‘수행성’ 등의 개념에 의해 반박을 마주하게 된다. ‘여성’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차이들이 실제 여성들 사이에 존재한다. 무한 개의 섹슈얼리티, 경제적 계층, 인종, 몸의 모습은 하나의 거울로 비추어 볼 수 없다. 필자 또한 리얼돌은 여성과 같으나 같지 않다고 생각하며, 더 나아가 딜도는 남성과 같으나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불일치를 자율적 주체라는 목표를 통해 해소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 섹슈얼리티의 항들이 새로이 재배치될 수 있는 긴장감으로 바라보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2부 진짜여자만큼 진짜 여자같은 리얼돌

1) <신체-섹스>

리얼돌은 어떻게 ‘리얼’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되었을까? 분명히 리얼돌은 ‘진짜여성’이 아니고, ‘진짜인간’도 아니다.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리얼돌에는 가짜 성기와 가짜 머리카락이 달려 있을 뿐인데, 그것은 무언가 ‘진짜’인 것을 모방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언뜻 보기에 리얼돌을 여자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그가 여성의 신체를 모방한 부위들을 가졌기 때문이다. 윤김지영 또한 그의 글에서 리얼돌이 구체적으로 ‘여성 신체’를 재현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리얼돌의 ‘리얼’함을 보증하는 원본은 여성의 ‘생물학적’ 신체이다. 여성이 탄소화합물로 만들어진 가슴과 질을 가졌다면, 리얼돌은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가슴과 질을 가졌다. 보부아르 이래로 여성주의에서는 섹스/젠더라는 체계가 생겨났다. 그에 따르면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60~70년대 제2물결 페미니즘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을 중요한 작업으로 두었다. ‘여성성’(젠더)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났고, 여성은 가사노동을 할 때 행복하다는 등의 이야기에 반대하기 위해 젠더는 구성물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때 섹스는 생물학적 사실이며 젠더는 이에 대한 사회적 해석의 차원이 된다. 그러니 우리는 여성의 질을 그의 생물학적 섹스를 보증하는 표식으로 부르듯, 리얼돌의 실리콘-성기를 그의 ‘생물학적’ 섹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기의 형태가 닮았다고 하여 리얼돌을 여성이라고 곧바로 단정짓기에는 무언가 의심쩍다. 그의 성기에 어디 ‘여성’이라고 적혀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실리콘-질을 가졌기에 여성이라고 인지되기 위해서는, 탄소-질을 가진 이는 여성이라는 아이디어가 선제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리얼돌은 ‘진짜여성’이라는 원본에서 ‘섹스’의 ‘리얼’함을 빌려 오며, ‘섹스’에서 ‘젠더’가 도출되는 것은 ‘리얼’하다는 생각을 반복하여 모방한다.


2) <문화-젠더>

리얼돌의 ‘리얼’함은 ‘진짜여성’의 섹스가 가지는 ‘리얼’함에서 온다면, ‘진짜여성’의 섹스는 ‘리얼’한 것일까? 우리는 흔히 자연과 문화의 영역을 구분할 때 전자는 사회 이전에 오는 것으로 간주한다. 마찬가지로 젠더를 주어진 섹스에 대한 사회적 해석의 영역으로 둔다면 섹스는 반박 불가능한 자연적, 생물학적 사실이 된다. 하지만 섹스라는 개념은 애초에 중립적인 사실일 수 없다. 섹스는 이미 젠더화된 범주이다. 다시 말해, 섹스 또한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섹스는 젠더에 의해 지칭된 문화적 효과이다. 질은 ‘여성’의 성기, 페니스는 ‘남성’의 성기라는 문화적 정의가 수립된 이후에야 질은 ‘여성기’, 페니스는 ‘남성기’가 되는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 보라. 우리는 열매가 열리는 은행나무에 ‘암’나무라는 이름을 짓고, 그렇지 않은 나무에 ‘숫’나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암’과 ‘수’라는 기준은 오로지 그들의 DNA에서 직접적으로 도출 가능한 성격의 것인가? 혹은 DNA와 번식의 방식을 특정 젠더라는 사회적 범주를 통해 이해한 결과인가?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이라는 개념은 인공적 통일체, 해부학적 요소, 생물학적 기능, 행동, 감각, 쾌락에 있어 모두를 하나로 묶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성은 이 허구적 통일체를 인과론의 원칙, 전지전능한 의미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섹스는 그리하여 유일한 기표이자 보편기의로 작동할 수 있었다.” 이처럼 푸코에게 성(젠더)은 인공적 개념으로서, ‘섹스’를 생산한다. 따라서 클리토리스와 질을 가진 신체에 여성이라는 섹스를 할당하는 것은 여성이라는 젠더가 확고히 자리잡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자, 섹슈얼리티를 한데 엮는 것으로서 ‘생물학적 섹스’라는 인공적 개념이 사용된다. 그렇다면 ‘진짜여성’의 섹스 또한 그 ‘리얼’함을 젠더의 ‘리얼’함에서 빌려오고 있는 것이 된다. ‘진짜여성’의 섹스는 리얼돌의 ‘섹스’와 마찬가지로 인공적, 허구적 구성물이며, ‘진짜여성’과 리얼돌은 모두 젠더에서 ‘리얼’함을 빌려오는 존재들인 것이다.


위와 같이 섹스가 그 자체로 젠더화된 범주라면 젠더를 섹스의 사회적 해석으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 젠더는 문화 이전의 ‘자연적 섹스’라는 개념을 생산하며, 이분적 섹스라는 구도는 이분적 젠더 구도에서 기인한다. 생물학적 섹스라는 개념은 여/남이라는 이분적 젠더를 전제하는 생물, 의료행위, 법체계와 같은 사회적 장치들을 통해 생산된다. 젠더에 의해 최종적으로 생산된 ‘자연적 섹스’라는 개념은 인과관계의 역전을 통해 자신이 ‘자연스러’우며 사회의 성립 이전부터 존재했고, 때문에 수정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라는 ‘리얼’함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타고난’ 섹스는 존재하며, 젠더의 내용이나 특정 젠더에게 요구되는 사항들은 사회적으로 수정될 수 있으나 자연적으로 주어진 섹스는 고칠 수 없다는 규범적 지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리얼돌과 ‘진짜여성’에게 ‘리얼’과 ‘진짜’라는 수식어를 제공하는 ‘젠더’, 특히 ‘여성’이라는 젠더는 어떻게 ‘리얼’함을 보장받는가?


3) <여성>

이제 우리에겐 마지막 질문만이 남았다. ‘진짜여성’은 진짜 ‘여성’인가? 리얼돌을 수동적 존재로 다루는 것이 여성을 수동적 여성으로 다루는 것과 인과적 관계를 가진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둘을 묶는 강력한 ‘여성’이라는 범주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실제로 존재하는 여성의 수 만큼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한데 묶어 ‘여성’이라고 통칭하기 위해서 그 범주는 내적으로 동일하며(모든 ‘여성’을 표현하는 ‘여성성’이 있다) 그 실재성을 보장받아야 한다(‘여성’은 허구가 아니라 실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섹스와 젠더가 ‘여성’이라는 초월적, 보편적 범주를 통해 일관적으로 통일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젠더 수행을 통해 ‘여성’은 문화적, 언어적 범주가 아닌 실제적 범주가 된다. 젠더는 육체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이지, 실체적 자아에게 부착되는 하나의 속성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젠더 수행 이전의 본래적 젠더는 없으며, 모두 수행을 통해 육체에 부착된 인공물일 뿐이다. “여기서 수행적이라는 의미는 목적한 정체성을 스스로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는 언제나 행위이다. 비록 그 행위에 앞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주체에 의한 행위는 아니지만 말이다.” 주의할 것은, ‘행위’는 실체적 자아, 혹은 자유로운 행위자 일반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오해를 막기 위해 ‘수행’이라는 개념은 이후 버틀러의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에서 ‘인용’으로 재서술된다. 이미 존재하는 내용을 인용하듯, 젠더 수행은 권력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행위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수행을 통해 ‘여성’, 그리고 ‘남성’이 ‘된다’.


이는 단지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여성을 단일한 존재로 일반화, 대상화 하는 데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버틀러는 기존의 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재현을 요구하였으나, ‘여성’이라는 범주는 여성을 재현할 뿐 아니라 ‘여성’이 누구인지 규정하는 규범적 기능을 가진다는 측면을 지적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여성’이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종, 계급, 민족 등 수많은 요소로 각기 다르게 구성되는 섹슈얼리티 간의 차이를 무화한다. 보편주의적 주장은 보편적인 억압과 의식의 구조가 있다고 상정하는데, 이는 결국 ‘여성’을 규범적이며 배제적인 범주로 만드는 것이다.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차이를 희생하여 일관적이고 통일적인 ‘여성’이 탄생한다. 이때 “안정된 성은 강제적 이성애의 실천을 통해 대립적인 것, 위계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여성-남성이라는 이분적 젠더관계의 상정은 페미니즘의 목표 자체에 상충할 위험을 가진다. ‘여성’ 범주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이분적 젠더 관계는 이성애중심성을 토대로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욕망을 이성애적인 것으로 만들면 ‘여자’와 ‘남자’의 표현적 특질로 이해되는 ‘여성성’과 ‘남성성’ 간의 분명하고 불균형적인 대립이 생산되어야 하고 또 제도화되어야 한다.”


요컨대, 리얼돌과 ‘진짜여성’은 재질 외에 다른 것이 없는 인공물들이다.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는 허구적 구성물이나 강력한 힘을 가진다. 실리콘-여성과 탄소-여성을 ‘여성’이라고 한데 묶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을 특정 위치에 강제하고, 동일한 개념으로 묶어내는 ‘여성’이라는 범주임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리얼돌이 ‘진짜여성’을 닮은 것이 아니라, 실리콘-여성과 탄소-여성이 가상의 ‘여성’을 닮은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정체성 정치에 대한 과도한 기대나 정체성을 단일하고 닫힌 궤로 두는 사고 속에서 ‘여성’ 속에서의 불화와 차이는 사라지고 허구의 ‘여성’은 더욱 단단해진다. 버틀러의 관점은 다양한 양태의 몸, 섹슈얼리티를 단일한 정치적 소실점으로 해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점을 가진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정치적 목표는 가부장적, 이성애중심적 체계 속에서 만들어진 ‘여성’이라는 범주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운동이 아니라, ‘여성’을 닫힌 범주로 두지 않고 그 안의 차이를 충분히 인지하며 해방으로 향하는 운동이 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 중 하나는 ‘패러디’라는 개념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현존하는 젠더라는 범주는 근원적 지위를 주장할 수 있는 ‘원본’이 아니기에 모든 젠더는 원본 없는 패러디에 불과하게 된다. “젠더 패러디는 젠더가 그 양식에 따라 형태를 갖추는, 원래의 정체성 자체가 모방본이라는 것을 폭로한다.” 규범에 복종하지 않는 패러디적 젠더 표현은 다른 ‘모방’을 생산할 뿐 아니라,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젠더에는 기원이 없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렇게 결론짓기에는 무언가 불편한 점이 남아 있다. 필자가 아무리 패러디적 젠더 수행을 하여도 필자의 행위를 패러디로서 해석하는 선의의 독자가 없다면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가령, 드랙쇼에서의 ‘여장남자’를 보고 “와, 멋지다! 가슴 수술만 하면 더 예쁘겠어.”라고 해석하는 관객이 있다면 그의 행위는 속절없이 기존의 규범 앞에서 좌절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여성’ 범주가 허구라고 하여도 각자의 몸에서 진짜여성으로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지금 이 순간의 여성-신체들에게 패러디가 정확한 전복의 지점, ‘유효한 새로운 젠더 생산’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지는 다소 의심스럽다. 버틀러는 몸이 가지는 존재론적 의미를 설명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젠더라는 범주는 끊임없이 젠더 표현들을 일원화하며 남성성, 여성성이라는 이분적 구도로 대립하여 고정시키고자 하지만, 몸은 이에 저항하며 복수의 젠더 표현을 가진다. “신체는 이성적 규범이나 재생산 규범을 넘어선 방식으로 존재하기도 하며, 신체의 문제가 이성애 가부장제의 코드를 뒤흔들어 버리기도 한다.” 몸은 단지 문화에 의해 해석되는 텍스트가 아니라 다른 몸들과 함께 살아 나가는 존재론적 실재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거주하는 신체가 어떤 물질적 토대에서 제작되었는지 살피고 자신의 신체를 사용하여 이성애적, 남성중심적 코드를 변경할 방식을 발견하는 것은 시급한 문제가 될 것이다.


3부 가짜들의 정치학

1) 리얼’돌’과 ‘여자’라는 사물

그렇다면 아직 질문을 멈출 수 없다. 우리가 잊고 있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리얼돌은 여성을 무엇으로 만드는가?” 리얼돌이 만드는 여성 범주의 불화는 무엇일까? 리얼돌에서의 ‘돌’이라는 요소를 보자. 리얼’돌’은 사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당연히 여성으로 여겨진다. 리얼돌은 탄소-여성과 실리콘-여성, 자연-인공의 경계를 또다시 흩뜨린다. 여성으로 여겨지기 위해서는 ‘자연적 섹스’로서의 탄소-질이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실리콘-질이라는 인공물로도 충분히 ‘여성’이 될 수 있다. 즉, 리얼’돌’은 우리 자신이 기술적으로 제작된 존재가 아닌지 질문하는 동시에, 기술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특정 젠더로 인식되는 충분조건일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폴 프레시아도 는 그의 책 <테스토 정키Testo Junkie>에서 제약pharmaco-포르노pornography-자본주의 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미셸 푸코의 생정치biopolitics를 확장한 개념으로서, 현대에 들어와 호르몬 시술과 생명공학이라는 기술로 우리의 몸, 섹슈얼리티가 더욱 촘촘하게 제작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피임약과 비아그라, ‘갱년기’ 여성에 대한 호르몬 투여 등의 방식으로 현대 자본주의는 분자적 차원에서부터 우리의 몸을 직조하고 있다. “호르몬은 탄소 사슬, 언어, 이미지, 자본, 집단적 욕망으로 만들어진 생물학적 인공물이다.” 버틀러에서 몸은 비체화된 문화의 찌꺼기이지만, 프레시아도에서 경제적 체계와 물질적 기술을 통해 제작되는 실제적 장이자 매끄럽게 규범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불화를 지닌 전복의 장이다. “정체성 생산과 특정 신체 기관을 성적인, 재생산적인(reproductive)것으로 제작하는 것에는 연관관계가 있다. 이성애적 젠더를 가진 몸의 생산은 문화적 재현 뿐 아니라 기술적 제작(호르몬치료, 외과수술 등)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기술과 ‘인간’의 접합체로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리얼돌이라는 인간-사물 접합체는 사실 새로울 것이 없다. 이러한 관점은 버틀러가 제시한 ‘수행성’, ‘패러디’라는 개념의 장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가 (의도치 않게?) 경시하지만, 문화적 규범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경제적 체계와 산업 구조에 대한 비판을 가능케 한다.

<그림 1>

우리는 리얼돌과 관련한 논쟁의 흐름 속에서도 곧바로 자본주의적 욕망에 의해 섹슈얼리티가 제작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일 국회 산업통상자원 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용주 민주평화당 의원은 “섹스토이 시장 규모가 전 세계적으로 2015년 24조원이며 2020년 33조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닌 섹스토이 시장이 규제 대상이긴해도 산업의 대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정확한 ‘33조 원’이라는 경제적 수치 뿐 아니라, 리얼돌 산업은 제조산업을 넘어 AI을 탑재한 ‘4차산업혁명-리얼돌’, 매끈한 육체와 더불어 매끈한 ‘정신’을 가진 실리콘-여성의 제작에 대한 암시에까지 이어진다. 리얼’돌’, 탄소-여성, 탄소-남성은 모두 같은 공장에서 만들어진다. 갈수록 둘을 정확히 구분하는 방도도 더욱 찾기 어려워 질 것이며, 사실 그럴 필요조차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택해야 하는 것은 돌아갈 수 있거나 모범이 되는 ‘자연’이나 ‘여성’, ‘남성’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공장의 가동을 멈추고 다른 방식의 생산을 시작하는 것일 테다.


2) 열린 몸들의 연합정치

“부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자연스러운 몸의 외형을 갖춘 나, 나는 너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 나를 악마화하기 위해 당신이 사용하는 그 자연(the Nature)은 거짓이다. 자연이 나로부터 너를 지켜줄 것이라 기대하지 마라. 그것은 네가 나를 희생하여 유지하려고 하는 특권이 토대가 없음을 은폐하려는 허구다. 너도 내가 구성된 것처럼 구성되었다 : 동일한 고대적 자궁(archaic Womb)에서 우리는 태어났다. ··· 이 말을 잊지 말라, 너도 너 자신에게서 솔기와 봉합사를 발견할 것이다." 이는 수잔 스트라이커가 트랜스젠더를 ‘인조인간’, ‘자연스럽지 않은 것’, ‘변태적인 것’으로 취급하던 당대의 주장들에 대해 한 말이다. 필자는 리얼돌도 우리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체는 닫힌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경제적/기술적/윤리적··· 맥락에 스스로를 한껏 개방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다. ‘여성’이라는 범주가 허구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불화하며 경합하는 ‘여성’이라는 장소 없이 정치할 수는 없다. 버틀러 자신도 주장했듯, “페미니즘의 정치적 과제는 재현 정치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와 사회에 변화를 만드는 데에 있어 특정 형태의 재현과 정체성은 피할 수 없다. ‘여성’이라는 공간을 닫힌 것으로 두는 것에 저항하며, 우리 자신을 제작하는 이성애중심주의, 불균형한 젠더관계, 남성중심적 섹슈얼리티, 제약-포르노-자본주의에 대한 치밀한 인식과 제작의 중단에 대한 요청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이미 생산된 리얼돌을 수입하는 데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 모든 청사진을 불태우는 정치 말이다.

 아, 하지만 너무 어렵다. 어떻게 모든 체계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이 딱 하나 있다. 우리는 이미 각자의 신체에 거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섹슈얼리티를 가진 열린 몸들은 ‘여성’앞의 수많은 수식과 접속에 스스로를 개방한다. 실리콘-여성, 탄소-여성, 트랜스-여성, 여성과 섹스하는-여성, 장애인-여성··· “열린 연합은 당면한 목적에 따라 번갈아 제정되고 또 폐기되는 정체성을 주장할 것이다. 그것은 정의상의 완결이라는 규범적 목적에 복종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집중과 분산을 허용하는 열린 집단이 될 것이다.” 또한, ‘여성’이라는 통일적 범주가 불가능함을 밝히며 원본 없는 모사를 실질적으로 생산하는 과정 속에서 현실화될 것이다. 상상해 보자. AI 리얼돌을 해킹하여 레즈비언으로 만드는 것, 실리콘-여성과 탄소-여성, 시스젠더-여성과 트랜스-여성이 함께 행진하는 것··· 상상은 우리의 몸에서부터 현실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몸은 ‘현실’을 고작 상상으로 뒤바꿀 힘을 가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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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그림1> Girlfriends, Nov./Dec. 1994, Reprinted with kind permission of Socket Science Labs<그림2> (선언문 상단의 검은색 양방향 딜도) https://lacoquette.com/glass-double-ended-dil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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