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타이프]
가끔은 남들처럼 한밤중에 잠을 자게 되는 날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었을 시각에 나도 이불 속으로 들어가 기꺼이 잠을 청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밤은 정말이지, 잠들기에 제격인 시간임을 새삼 깨닫곤 했다. 남들이 어째서 밤에 잠을 자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집 안을 계속해서 뛰어다니거나 물건을 던지듯 아무렇게나 내려놓는 소리도, 시끄럽게 고함을 지르는 일도 밤에는 드물었다. 창밖으로 자동차 경적과 엔진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럭저럭 세상이 적막해진다. 아마도 이건,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한적하고 외진 동네에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을 끄고 누워 있는 방 안은 암막커튼 덕분에 더욱 완전한 어둠이 된다. 달빛도, 희미한 가로등 불빛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눈을 뜬 채 누워 있으면 말 그대로 캄캄한 어둠뿐이다. 내가 지금 눈을 뜬 건지, 감고 있는지가 헷갈릴 정도다. 무(無)라는 게 있다면 이런 것일까. 나의 고막에 가득 들어찬 부드러운 적요. 세상이 이토록 조용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는다.
자연스럽게 모든 감각이 소거된 상태로 단지 잠을 청하는 것만큼 나에게 낯선 일은 없다. 귓가에 닿는 적막이 너무나 촘촘하고 농밀해서 마치 젤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한다. 어둠이 내 뺨을 핥고 있다. 나는 온순한 어린아이처럼 그것에 몸을 맡긴다. 비로소 휴식을 취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평소 낮밤이 뒤바뀐 채로 사는 나에게, 때로는 이런 날도 있었다고 적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