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를 읽고 있습니다. 책 속에서 마음에 드는 글귀를 두 페이지 가득 썼습니다. 노트하면서 책을 읽으니 속도는 느렸지만 두고두고 읽을거리를 만들어 놓은 것 같아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어요. 일요일의 공기처럼 쓰는 내내 참 평화로웠습니다. 눈과 손, 그리고 생각뿐이었어요. 집중을 하니 소리가 차단되고 내용들이 쏙쏙 들어옵니다. 인기 있는 책이라서 그런가 봐요. 다름을 느낍니다. 한 장 한 장의 내용들이 마음에 찰싹 달라붙기도 하고 눈물이 핑 돌기도 합니다. 길지 않은 글 하나에 온갖 것들이 들어있는 보물창고 같았습니다.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잉크 방울을 이해해 달라는 작가의 말이 왜 그런 건지 아주 조금 이해가 됩니다. 쉼표로 글을 읽은 후 잠시 생각을 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빠르게 돌아가는 정신없는 세상에서 이 짧을 글이라도 읽고, 조금 쉬어가라는 작가님의 의도에 목이 메었습니다. 가끔 페이지를 넘기려다 읽은 것을 또 읽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새롭게 느껴졌어요. 글을 정독하지 않고 그냥 읽어버리는 일도 허다하잖아요. 아마 두 번 읽은 것조차 까맣게 잊힌 페이지도 있었을 겁니다. 영화를 보고 시간을 두었다가 또다시 보면 난생처음 보는 것 같은 장면들처럼 보이는 것처럼요.
친구에게서 귀한 연필을 선물 받으며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필사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한동안 정말 열심히 연필로 필사를 했었지요. 그.런.데 연필이 사라졌습니다. 도통 찾아도 보이질 않았어요. 귀하게 여겨 잘 가지고 다녔어야 하는데 그만.
연필이 어딘가에서 짜잔 하며 나타나길 기다려 봐야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볼펜으로 필사를 합니다. 연필로 글씨를 쓰면서 ㅂ을 2획이 아닌 4획으로 또박또박 쓰려고 노력했었어요. 그러다 보니 제 글씨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초등학교 저학년 글씨체가 돼버렸습니다.
다시 볼펜으로 필사를 하면서 ㅂ 을 4획으로 또박또박 쓰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드물게는 쓰윽 2획으로 쓰기도 했지만요. 어쨌든 ㅂ은 4획으로 쓰는 것이 맞습니다. 내일이 한글날이네요.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님께서 ㅂ을 또박또박 4획으로 쓰는 저를 보시고는 빙그레 웃으시겠지요?
시골에 가려고 집안을 치우고 반찬을 챙겨 만듭니다. 딸들이 좀 더 편했으면 하는 마음과 돌아왔을 때 딸들이 집안을 깨끗이 해 놓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입니다. 냉장고에 먹다 남은 야채들과 반찬들도 비빔밥을 해 먹으며 정리를 했습니다. 쓰다 만 애호박과 까놓은 양파 몇 개, 더하여 감자를 까서 카레라이스를 만들었지요. 애들이 들어왔을 때 쉽게 끼니를 해결했으면 하는 엄마 마음으로요. 소분하여 일 인분씩 차곡히 쌓인 냉장고를 보니 흐뭇합니다. 어디에나 쓸 수 있는 맛간장 양념도 한편에 자리했습니다. 양념장은 두부도 지져 찍어 먹고 갓 지은 밥 위에 계란을 투척하고 참기름을 듬뿍 넣어 비벼 먹어도 일품요리가 울고 갈 만큼 맛나거든요.
어떤 때는 냉장고를 열어보지도 않은 것 같이 그대로 있기도 합니다만 꼭 챙겨 먹으라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곁들여야겠습니다.
이번 시골살이는 모레가 출산 예정일인 노르웨이 산모가 진통이 시작되면 달려와야 합니다. 아기를 받을 만반의 준비는 애저녁에 마쳤고요. 녀석이 평안한 시간만 택해 태어나기만 하면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밤하늘을 보니 초승달이 등을 굽히고 있네요. 보통의 아기들은 만월이 되면 태어나던데 녀석은 아닌가 봅니다. 혹 지금부터 보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길 등 굽은 초승달에게 말해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