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도서관에서 '노르웨이의 숲'을 빌리다.
다시 걷기로 작정했다. 늘어져 있던 몸을 추스르면 세포들이 신나 마음을 춤추기를 바라며.
푸슬푸슬 비가 내리지만 굳이 우산까지 쓸 필요는 없었다. 해가 지고 있다. 나의 실루엣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으려면 이런 어슴푸레한 조도가 안성맞춤이다.
아파트 옆 널따란 공터에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대부분 걷는 사람들이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으련만 걷기에 몰두하고 있다. 치열하게 해내고야 마는 민족성은 내 대에서 끝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여유롭고 평화롭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듬성듬성 걍아지산책을 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들보다 개가 더 많은 우리 동네는 지금 막 노년기에 들어선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아무튼, 나도 그들 무리에 섞여 걷고 있다. 얼마큼, 어느 방향으로 걸을까를 고만하다가 일 년이 넘도록 곁을 내주지 않았던 스마트 도서관으로 향했다. 집에는 읽어야 할 책들이 즐비한데 도서관서 빌린 책을 제대로 읽기나 할까 생각했지만 도서관이라는 자체가 사람을 두근거리게 하는 이상한 힘을 가진 게 분명하기에 내 발걸음은 빨라졌다. 내가 가야 할 방향 반대쪽으로 훤칠한 젊은이가 핸드폰을 보며 오고 있다. 핸드폰 불빛에 청년의 얼굴을 선명하게 비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가 불편하지 않게 지나쳐 갔다. 부딪히며 살아왔던 날들로 내 몸속엔 돌아가기를 자처하는 유전자가 생긴 것임에 틀림없다. 부딪치지 않도록 기다려 주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그렇게 청년과 나는 불편하지 않게 지나쳐 갔다.
스마트 도서관은 길가에 부스 형태로 설치되어 있다. 길을 가다가 언제든지 책을 빌릴 수 있다니, 좋은 세상이다. 사 년 전, 이 동네로 이사를 오자마자 도서관 앱을 깔고 회원 등록을 했다. 한동안은 참 열심히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신이 났었다.
이용하는 사람들이 드문 시간이어서인지 자동문이 열리자 에어컨의 찬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왔다. 목덜미에서 흘러내리던 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책을 소개하는 북 키오스크에는 요즘 잘 나가는 책들이 화면에 떠 있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인데 마침 그 작가의 책이 키오스크 메인화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키오스크에 올려져 있는 겉표지는 민음사의 최근 디자인이다. 깔끔하니 새 책처럼 보였다. 책 번호는 96, 북키오스크 옆에 또 다른 대출을 담당하는 기계로 가서 책을 받으면 된다.
96,96,96, 책 번호를 잊을까 봐 입 밖으로 계속 96을 말했다. 혼자였으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과 함께 부스에 있었더라면 슬그머니 나와서 있다가 아무도 없으면 다시 들어갔을 것이다. 사람들이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리브로피아' 도서관 앱을 켰다. 어언 일 년이 넘도록 사용하지 않았기에 한참을 버벅거리며 키오스크와 씨름을 해야 했다. 내 고유의 바코드를 화면에 찍고 나니 비밀번호를 누르라고 했다. 세상에나, 비밀번호가 뭐였을까? 지금의 세상은 온통 비밀번호로 묶여있어 늘 짜증이 나곤 하는데, 오늘도 역시다. 그 비밀번호를 해킹하는 도둑놈들의 머리는 천재임에 틀림이 없다며 비 맞은 중처럼 투덜거렸다. 몇 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기계 앞에 똑바로 서서 비밀번호를 기억해내야 했다. 내 뇌를 아무리 풀가동 시켜도, 내가 아는 네 자리 비밀번호를 몽땅 눌러도 틀리다는 글자만 나왔다. 무슨 번호를 눌렀는지 나조차 잊고 있는 순간 다음 화면으로 넘어갔다. '노르웨이 숲' 책 번호 96을 눌렀다. 그제야 덜커덩 책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쑤우욱, 자동으로 책이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문이 도로 닫힐 것 같은 불안감에 현금 자동지급기에서 돈을 찾을 때처럼 잽싸게 책을 꺼냈다.
이런 쓸데없는 소소한 불안감은 나만 느끼는 걸까? 다른 이들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와! 이런 책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북 키오스크에서 봤던 책과는 달리 겉표지가 너덜너덜하다 못해 속지의 일부 20페이지 정도도 떨어져 있는 책이었다. 그만큼 인기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니 위안이 되긴 했다. 한편으로는 책을 읽을 두근거림보다 책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 멀쩡하게 만들어야 할까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테이프를 붙일까? 글루 건으로 붙일까? 그러면 보기 흉해질 텐데 뭘로 이 책을 깔끔하게 고칠 수 있을까? 책을 들고 집으로 오면서 내내 그런 생각뿐이었다.
일단 책을 수리하는 것보다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앞섰다. 1987년에 발행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의 첫 페이지는 그런대로 술술 읽혔다. 소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첫 장부터 흥미로웠다. 세 시간 동안 나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8월에 선정된 자전적 에세이'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보다 '노르웨이의 숲'을 먼저 읽게 되리라 예상했다.
밤이 되었다. 스마트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느라 조금밖에 걷지를 못했으니 다시 걸으러 나간다. 시작 첫날이니 오늘은 5 천보만 걷기로 했다. 책 속 이야기에 등장한 비틀스의 Norwegian Wood를 찾아 듣는다. 기타의 선율과 귀에 익은 비틀스의 비트가 걷고 있는 길과 닮아있다. 바람이 더운 열기를 가져가니 발걸음이 더욱 가볍다. 다시 걷기를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