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옥진 Jul 16. 2024

유쾌한 장례식 1.

죽음에 대하여

아버지의 흔적을 하나씩 지우며 동생은 울었다.

입관을 마치고, 아버지의 통장을 해지시키며, 사망신고를 마치고 돌아 나오며 울었다. 내내 꽉 틀어막고 있던 구멍에서 봇물이 터지듯 그렇게 눈물을 쏟았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동생에게 왜 우냐고 물었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보다 동생이 우는 것이 더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내 동생을 왜 울게 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동생과는 반대로 난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물결치며 솟아오르려 준비하고 있던 눈물은 동공 위를 잠깐 머물다 사라졌다. 울고 싶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장례를 치르는 나흘간, 피곤했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잘 먹고 잘 잤다.


아버지의 주검을 곁에 두고서도 울지 않는 내게 딸은 말했다. "울지 않는 엄마를 보는 게 더 슬퍼!"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딸은 목이 멘 듯 침을 삼키더니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모두 제 설움에 우는 거지, 엄마는 지금 설움이 없나 봐. 설움 없는 지금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그냥 지금, 그런 마음이 드네.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은 그동안 하나씩 하나씩 모두 날아가 버렸어. 너도 알잖아. 할아버지가 할머니 돌아가신 후에 어떻게 사셨는지. 엄마 마음이 어땠는지 조금은 알지? 어딘가로 숨어버리셨잖아 전화마저 거부를 하셨고 간신히 찾아내보면 어떤 할머니와 아주 즐겁게 계셨던, 문도 열어주지 않고 그냥 가라던.. " 나는 눈을 맞추며 웃었다.

내 마음이 어떨지 딸은 알까? 곱씹고 또 곱씹고서야 목이 메는 슬픔을, 두고두고 야금야금 꺼내지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엔 딸은 아직 여물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의 미소를 보며 눈물을 훔친 딸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나를 안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딸의 손길이 얼마나 따듯한지 한참 동안 안고 있었다. 스산한 마음과 스물네 시간 내내 돌아가는 냉랭한 에어컨 바람에 식어버린 몸뚱이가 딸의 위로에 녹는다. 슬쩍  '장례식장도 유쾌하고 즐거우면 안 될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툭하면 눈물을 떨구었던 어린 시절, 나는 일찍이 설움이란 걸 알았다. 어머니는 여덟 살 어린것을 서울서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이유로 외가댁에 맡겨놓고 아버지의 전근지를 따라 지방으로 내려갔다. 딸을 떼어놓고 가는 어머니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는 않았겠지만 내 안의 설움의 시작은 그때부터 싹텄다. 나를 안아줄 엄마가 없어서 마음은 늘 비어있었다. 받아쓰기를 연일 100점을 맞아도 칭찬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저녁이 되어야지 돌아오는 이모와 삼촌들의 칭찬은 공허하기만 했다. 난 엄마의 칭찬을 듣고 싶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집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집에서 동그란 재봉틀 의자에 엎드려 빙글빙글 하염없이 돌고 나면 멀미 나듯 엄마가 그리웠다. 그리고 가끔 할머니에게 혼이 날 때면 더 서러웠다. 요에 오줌을 쌌다고 혼났을 때에는 서러운 한편 내 자신이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말참견한다고 머리를 쥐어박고 어린것이 토를 단다며 눈을 흘기는 외할머니가 무섭기도 했다.

엄마는 내게 그러지 않는데 말이다. 할머니에게 혼나는 날엔 골목 쓰레기통 옆에 쭈그리고 앉아 서럽게 울었다.

1년 후 나는 다시 가족들과 살게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온 건 아니었다.

메스 꺼리는 울렁거림은 어른이 된 후에도 가끔씩 나를 찾아왔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의 냄새는 어느 공간엔가 숨어 있다가 슬그머니 내 옆을 스치고 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난 다시 어린 시절로 시간 여행을 하며 그 설움을 마주했다.


쩍쩍 갈라져 말라버린 흙바닥에 딸과 동생이 흘리는 눈물이 단비로 나린다. 얼마나 많은 눈물이 떨어져야 생명이 살 수 있을까? 차갑게 굳어버린 겨울밤을 닮은 나의 마음에도 꽃 피는 봄이 올까? 내 안엔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또 다른 나는 언제쯤 밝은 태양과 마주하게 될까?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18시간이 지나서 입관식을 했다. 냉동실서 나온 아버지를 장례지도사들이 염습을 했다고 했다. 시신을 깨끗이 씻고 몸을 반듯이 한 후 새 옷으로 갈아입히는 것이 염습이라고 했다.

염습을 하면서 몸에 있는 모든 구멍도 솜으로 막아버린다 했다. 그래도 '코만은 맨 나중에 막으면 안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간의 공기를, 가족들의 폐에서 들고난 공기를 아버지도 느꼈으면 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기들이 서로 뒤엉켜 생기를 나누기를 바랐다.


문득 이십 대 시절, 산부인과 신생

아실에서 마주했던 아기의 주검이 떠올랐다.

선배들이 태어나 며칠밖에 살지 못한 아기의 몸을 수습했다. 깨끗이 씻기고 달려있던 주삿바늘과 반창고 자국을 지웠다. 너무나 작은 사람이라 어른의 손이 너무나 크게 보였다. 보기만 해도 심장이 쿵쿵거리는 나와 달리 선배들의 손길은 정중하고도 부드러웠다. 처음으로 아기의 주검을 마주하며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죽으면 어디로 갈까? 육신이 없어졌는데 마음도 없어지는 걸까? 며칠 동안만이 온전한 삶이었던 아기는 삶을 어떤 것으로 기억할까? 인큐베이터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아기들이 보였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아기에겐 삶의 전부라 생각하니 허투루 아기를 대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다정한 손길을 기억하며 하루빨리 건강해지기를 되뇌었다.

죽은 아기에게 맨 마지막으로 했던 일도 소독솜으로 작은 몸에 난 구멍들을 막는 일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코만은 막지 말았으면, 할 수 없지만 맨 마지막에 막기를 바랐다. 현실에서는 그건 단지 나의 바람일 뿐이었다. 뻣뻣해진 작은 아기시신을 가족들에게 건네는 일은 내가 했다.


장례를 돕는 이들이 외쳤다. "천 냥이요! 이 천 량이요!"  저승길 가며 쓸 노잣돈이라며 동전 두 개를 입에 넣는다. 아버지가 입은 삼베옷 사이에도 종이돈도 꽂는다. 이왕이면 금액을 최고로 올려 적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죽어서도 돈이 필요할까? 삐죽거리는 내 입 모양새가 들키지 않았으면 했다. 모든 과정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치르는 예(禮)다. 살아생전에 받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쁜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한다던지 명절에 가족 모두의 세배를 받으셨더라면, 간간히 소풍을 갔었을 우리들이었을 것이다. 남은 생에 마음속 응어리도 옅어지고 고운 미소만 기억되었더라면. 이제 모두 소용이 없다. 끝없는 아쉬움만 쓰나미 되어 내게 덮친다.


얼굴은 숨을 거두셨을 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좀 웃어주시지. 그렇게나 내게 웃는 얼굴 타령을 해 놓고선 당신은 왜 그러고 계실까' 오욕 칠정이 사라진 주검 앞에 난 또 억지스러운 생각을 했다. 사람은 늘 웃는 얼굴을 하는 것이

보기 좋다 시던 아버지, 다림질한 옷에 구김 간다고 버스에서도 반듯하게 서 계시던 멋쟁이 아버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수의를 입은 채 사각형의 관 안으로 들어갔다.


관의 구석마다 장미꽃과 안개꽃을 놓여있다. 꽃들에게서 나오는 향기에 아버지는 위안을 받을까. 아버지도 그럴지 모르겠으나 굳어버린 언 몸 옆에 놓인 꽃들을 보며 되려 내가 위로를 받았다. 고맙다 꽃들아.

향기로운 것을 좋아하던 아버지가 꽃밭에 누워있다. 장례지도사가 관 뚜껑이 닫히게 되면 더 이상 아버지를 볼 수가 없다며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라고 말했다. 여전히 임종의 모습 그대로다. 기억 속 아버지의 모습은 오간데 없다.


삼 형제 부부와 손자들이 아버지를 둘러쌌다. 잎사귀 다 떨어진 마른 가지 같은 아버지의 몸은 혼자서도 들 수 있을 만큼 가늘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게 하느라 장례사들이 애쓴 흔적이 보인다. 하얀 솜이 가득 들어 있는 아버지의 입은 여전히 조금 벌어져 있다. 마지막 들이킨 들숨은 얼마나 달콤했을까


딸이 또 운다. 왜 울까? 뭐가 슬플까? 남아있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무엇일까? 생각의 끝자락에 나는, 나를 대신해  울어주는 딸이 고마웠다. 누군가 훌쩍거려야 보기 좋은 입관식에서 딸은 구색을 맞춰 주었다. "자,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하세요. 관이 닫히면 아버님은 더 이상 뵐 수 없습니다" 소름 돋는 짧은 고요가 흘렀다. 진정이 된 딸의 훌쩍임만이 공간에 흩어졌다. 순간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와의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이제는 볼 수 없다. 아버지의 죽음이 실제로 가슴에 와서 박혔다. 관 뚜껑 네 모서리에 못 박는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보고 싶지 않은 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 아버지를 향한 셀 수 없는 감정들을 모두 가져가시라고 기도했다.

여전히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큰 동생이 입관식을 마치고 걸어 나오며 눈을 훔쳤다. 왜 남자는 크게 울지 못할까. 가슴이 미어질 때 크게 소리 내어 우는 것이 왜 부끄러울까. 솔직을 터부시 하는 예절에 신물이 난다.


눈물 대신 여러 번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답답했다. 목이 조여져 오는 기분이 들었다.

장례식은 유쾌하면 안 되는 걸까? 최소한 나의 장례식은 유쾌하게 치르라고 딸들에게 부탁해 봐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