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케케묵은 결혼 때 샀던 나무 옷장을 버렸다. 아이들이 여기저기 붙여놓은 스티커, 이사 다니며 긁혔던 모서리, 신혼 방에서 풍겼던 나무냄새 등, 나의 지나간 시간들이 옷장에 새겨져 있다. 묵묵히 나를 지켜보았던 어른이 사라지는 것 같아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했다. 습기라고는 거의 없어 한순간에 타버릴 듯한 가벼워진 옷장이 이삿짐을 나르는 인부들 손에 가뿐히 밖으로 나갔다. 너무 오래된 장롱이라 재활용으로 사용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장롱이 사라지고 나니 인생 2막이 열리는듯했다. 새로 이사 간 아파트에는 붙박이장이 안방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널따란 공간은 사철 옷을 걸어놓아도 될 정도로 큼직했다.
버릴 옷들을 정리하고 산뜻한 옷들을 추려내었건만 걸고 나니 금세 꽉 차버렸다. 뒤로 물러서서 새 옷장에 걸려있는 옷들을 보았다. 저 옷들을 언제나 입을까
옷장은 꽉 차 있는데 입을 옷이 없다. 알고 보면 없는 것이 아니라 정리가 안 되어 있는 거였다. 입고 나서 깨끗이 세탁을 해 놓아야 다음에 금방 입을 수 있는데 대부분의 옷들이 한두 번 입다 그냥 걸어 놓은 것들이다. 계절이 어찌나 빠르게 변하는지 언제 세탁을 했는지도 기억되지 않는다. 옷들은 퀴퀴한 냄새도 나는 듯하고, 일부는 구겨진 채로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당연히 그런 옷들은 선택되어 입혀지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난다. 다시 유행이 지나서 촌스러워 보이는 옷, 체형이 바뀌어 입기가 불편해 손이 가지 않는 옷들로 구분할 필요가 생겼다.
나의 게으름에, 바쁘다는 핑계에, 옷들이 본래의 자태는 사라지고 서서히 버려질 준비를 한다. 마치 천천히 늙어서 죽음을 준비하는 노인의 모습 같기도 하다.
필리핀에 살았던 적이 있다. 더운 나라인 만큼 사람들은 해뜨기 전에 일찍 움직이고 해지고 나서 거리로 나온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이나 잠깐
필리핀에 일하러 들어와 있었던 나 같은 사람들은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곳에서 일을 했기에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한 데에서 생활해야 하는 그들 대부분은 흰 티셔츠에 청바지가 대부분이었다. 더운 날씨가 사철 계속되니 계속해서 한두 가지 옷만 바꿔 입어서인지 낡아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옷들도 눈에 자주 띄었다. 입성을 중요시하는 나는 그런 그들이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그들에겐 옷은 내가 생각하는 개념과 다른 차원인 듯 했다. 당시 나는 볼링에 푹 빠져 있었다. 새벽 세 시까지 볼링장에 있었으니까. 봉급의 삼분의 일은 볼링장 사장에게로 돌아갔다. 볼링을 치는 사람 중에는 중국인 부자들도 있었는데 (벤츠가 가족 한 명당 한 대씩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들이 입은 옷은 참 가관이었다. 임산부처럼 불룩 나온 배를 낡은 티셔츠로 간신히 가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가끔 볼링공을 던지려 팔을 올리면 살짝씩 그들의 출렁이는 배와 배꼽, 보일락 말락 하게 엉덩이가 보였다. 그 모습이 거슬리고 이상하게 보이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그 누구도 그들의 옷에 난 구멍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볼링을 치며 즐기는 것이 중요하지 입고 있는 옷은 상관치 않는 그들만의 신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신나게 소리치고 손뼉 치며 즐거워하던 그들은 유유히 벤츠를 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벤츠도 없고 집도 없는 내가 옷의 색을 맞추고 구두와 가방이 그 색에 어울리는지 고민을 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서서히 옷에 대한 나의 관점이 바뀌기 시작한 때였다.
어머니는 평소에 아버지의 공무원 박봉에도 남편의 옷에는 부잣집 사장 못지않게 돈을 쓰셨다. 가끔 어머니가 아버지의 옷을 사는데 들이는 돈을 보며 흠칫 놀란 적도 있었으니까. 입성이 좋으면 어디 가서라도 무시당하지 않고 대접을 받을 수 있다며 그랬다. 깔끔한 아버지 성격과 어머니의 그런 대범함은 내게 아버지는 정말 젠틀한 멋쟁이로 기억되기에 충분했다. 포마드를 바르고 7:3으로 반듯한 가르마를 탄 아버지는 허리는 언제나 꼿꼿하고 반듯했다. 삐딱한 자세로 방바닥에 누워 있거나 기우뚱하게 서 있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출퇴근 길에도 바지의 주름이 구겨질세라 버스에 자리가 나도 앉지 않으셨다는 후일담도 들었다.
어릴 적 나와 동생은 비가 오는 날이면 구두와 장화를 들고 아버지 출근길과 퇴근길을 배웅하고 마중도 나갔다. 멋쟁이 아버지를 위해 출퇴근길에 아버지의 구두는 우리 손에 들려 호사를 누린 셈이다. 세상이 좋아져 지금은 그런 흙탕길에 신발이 더럽혀지는 일은 없지만 호사를 누렸던 아버지의 신발은 조잘대며 아버지와 흙탕길을 걷던 행복했던 우리와 헤어져서 분명히 섭섭했을 것이다.
나랑 함께 사는 남자는 아버지와 정 반대로 털털하다. 나 역시 옷으로 잘 보이려는 허황된 생각은 추호도 없기에 우린 대충 본인들이 하고 싶은 데로 하고 산다. 남자는 구겨진 셔츠 입기가 다반사고 흙 묻은 지저분한 구두를 신고 다니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담뱃불이 튀어 구멍이 난 비싼 바바리를 아깝다며 입고 다니는 그다. 뒤쪽에 난 구멍이라 자기 눈엔 안 보인다나. 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지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우리 집에 오셔서 슬그머니 그 바바리를 내다 버리셨다.
가끔 우리 집에 어머니가 왔다 가시곤 했다. 딸 내 집에 오셔서 하셨던 일 중에 하나는 남편의 모든 와이셔츠를 빳빳이 다려놓은 것이었다. 한 번은 스무 개의 와이셔츠를 다려놓고 땀을 닦으시며 내게 마누라 노릇을 제대로 못한다며 구시렁구시렁하셨다. 내가 남편의 셔츠를 다리지 않는 이유의 내면엔 아버지의 셔츠와 바지를 빳빳하게 다리느라 고생한 어머니의 삶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어릴 적 반항심의 발로이지 않을까 싶다. 결혼을 하기 전에 나는 남편과 약속을 한 것이 있다. 그중 하나는 '자기 옷은 자기가 다려 입기'였다. 서로 일을 하니 당연히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껏 내내 그 약속은 지켜지고 있다. 남편 옷을 다리지 않는 딸에게 겉으로는 뭐라 하셨으나 속으로는 나를 응원했을 어머니는 지금 곁에 없다. 옷장 앞에 서면 나는 불쑥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남편의 셔츠는 여전히 구겨져 있다. 가끔 필요하면 본인이 다려 입기도 한다. 다림질 안된 셔츠가 하나 둘 옷장에 걸리기 시작하면 그도 어머니를 생각날까?
불쑥 오래된 이야기가 생각나게 한 내 옷장을 들여다보며 그동안 여러 곳서, 여러 이유를 핑계로 사들인 옷들이 제 역할을 다 했는지, 앞으로 다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내가 모델이 아닐진대, 젊은 청춘의 한가운데가 훌쩍 지나갔는데, 멋진 옷을 탐낼 이유는 이젠 없다. 이제는 정리를 하며 살아갈 나이가 되었다. 십오 년 전, 어머니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 간결하게 정리된 어머니의 옷장을 마주하고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혜롭게 마지막 준비를 한 어머니를 본받고 싶어 진다. 그나저나 요사인 불편치 않고, 부드러운 것만 찾다 보니 뱃살만 늘어나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