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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엔 고양이 세 마리가 있었다.

마지막 고양이

by 김옥진

우리 집엔 고양이 세 마리가 있었다. 모두 아기 때 데려와서 지지고 볶고 살았다. 7년 전 아비시 아니종 나루가, 작년엔 샴 인 소리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남은 고양이는 노랗고 흰색이 섞인 토종 고양이 코리안 숏헤어(코 쇼트)의 유형 중 하나인 "치즈 태비"뿐이다. 고양이 세 마리 중 가장 어린 상태로 왔기에 꼬맹이라고 불렸다.


아파트 지하 어디쯤에서 며칠간 어미를 찾아 목놓아 울고 있던 녀석을 구조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고양이의 수명은 15년 정도라고 하는데 꼬맹이의 나이가 올해 15살이다. 사람으로 치면 고조 할아버지뻘이다. 가끔 변비로 고생하거나 먹지 못해 마르기도 해서 동물 병원을 오가기도 했다. 녀석의 목소리는 별나서 새벽을 설치는 날들이 많았다.


그러던 녀석이 2주 전부터 덜먹고, 점점 더 말라가더니 요 며칠은 눈에 띄게 야위었다. 죽음을 직감한 동물들이 보이는 행동도 보인다. 즐겨 오지 않았던 안방 화장실 구석에 종일 누워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안타깝게도 하루하루가 눈에 띄게 야위어간다. 딱히 말을 하진 않지만 나를 비롯한 가족들은 꼬맹이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째였던 소리가 늙어 스러지는 과정과 너무나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다. 살아있는 것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공평하다는 생각을 한다. 시간은 늘 한계가 있으며 어느 누구도 세월을 이길 자는 없다. 그렇게 여기니 15살인 꼬맹이는 고양이로 태어나 천수를 누린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뼈만 앙상하게 튀어나오고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급기야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일은 쉽지 않다. 3일 전까지만 해도 식탁 위나 싱크대 위를 위태롭게 걸어 다녔던 녀석의 시간은 끝을 향한다.


끝을 향한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급기야 이틀 전부터는 물 한 방울도 못 먹고 있다. 억지로라도 물을 주려 하니 꼬리털을 부풀리며 먹기 싫다고 진저리를 친다. 꼬리털을 부풀리는 일이 힘없는 녀석에게는 더 힘든 일일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자연스럽게 속을 비우는 녀석이 한편으로는 기특하다. 노란색과 흰색으로 어우러진 멋진 털은 그루밍을 못해서 뿌옇게 엉클어졌다. 아무리 쓰다듬어도 소용없다.


꼬맹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고 숨을 쉬고 있는지 배를 살펴보는 일뿐이다. 혹시나 몰라 가깝게 물그릇을 놓아주었다. 아침마다 죽음을 확인하는 아침이 아침답지 않다. 시시때때로 내 심장도 덜컹거린다.


녀석의 주인은 작은딸이다. 딸에게만 곁을 내주고 다른 가족에게는 경계가 심했던 녀석이다. 평생 동안 길고양이 성향을 버리지 못한 채 늙었다 . 친해지려 다가가면 어딘가로 숨이 버리곤 했다. 그러던 녀석이 근자엔 안방 침대 위로 스스럼없이 올라오기도 하고 내방 화장실 구석에서 종일 자기도 했다. 마치 전부터 제 구역이었던 것처럼 도망가지도 않고 천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내게 화해를 청하는 것일까. 그동안 곁을 주지 않은 것이 미안했던 걸까. 무슨 의도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행보를 보인다. 그저 모른척하고 화장실과 침대를 내어주었다.


그저 얼마 남지 않은 생이 많이 아프지 않기를, 외롭게 혼자 가지 않기를 바란다. 요 며칠 동안 집안일을 하며 혼자 중얼중얼 기도를 한다.


오늘 밤은 유난히 밤이 깊고 중후하다. 오늘따라 화장실 구석에 누운 녀석의 곁을 지켜주고 싶어졌다. 꼬맹이의 배가 움직인 것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왠지 모르게 오늘은 깜깜한 곳에 두고 싶지 않아서 스탠드를 벽을 향해 켰다.가물거리는 희미한 호흡이 보인다. 1분에 열 번의 호흡으로 꼬맹이의 삶이 가늘게 연결된다. 육감적으로 이 밤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이 슬그머니 옆에 와서 앉았다. 잠시 후, 엄마를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다며 녀석을 안고 자기 침대로 데려간다. 죽음이 다가오는 녀석을 쓰다듬는 딸은 어떤 생각을 할까. 요 며칠 동안은 방문을 열고 딸 옆방에서 잤다. 묵직한 삶을 견뎌내며 얻은 침착함을 나누고 싶어서였다.


막바지 시간이 다가온 듯 보였지만 또다시 태양은 떠올랐다. 여름의 막바지를 알리는 매미소리가 가득하고 녀석의 자리는 지금껏 그지없이 고요하다. 출근 준비를 마친 딸이 아무 말 없이 녀석을 쓰다듬었다. 녀석의 꼬리가 가늘게 움직인다. 몸을 뒤척이지만 기력이 쇠하여 돼 눕지는 못한다. 한쪽으로 있는 것이 불편해 보여 반대 방향으로 뒤집어 주니 괴롭다는 듯 몸을 비튼다. 생각해서 해주는 일이 상대방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리라. 딸이 아기 달래듯 미안하단 말을 한다. 출근하는 딸을 안심시킨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만 같아 입을 닫아버렸다. 눈이 마주쳤다. "엄마가 꼬맹이 옆에 있어줄게" 우리는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9:58분, 딸이 나간 후 채 십 분이 되지 않아 임종 호흡을 한다. 이제 괜찮을 거야. 편안한 곳으로 가렴. 사랑해 꼬맹이야. 혼자 중얼중얼 기도가 절로 나왔다. 입을 벌리고 큰 숨을 느리게 쉰다. 벌어진 입 사이로 이빨이 보이고 헌 잇몸이 보인다. 죽음의 냄새일까 생선 썩은 내가 난다. 딸이 귀여워 어쩔 줄 몰라하던 핑크빛 발바닥이 점점 보랏빛으로 변한다. 벌써 발은 차갑다. 제 키를 자랑하고 싶어서 일까? 경련을 하는걸까. 기지개를 켜듯 다리를 쭉 뻗으며 허공에 헛발질을 한다. 열 시 십일 분, 꼭 쥐고 있던 앞 발가락이 펴졌다. 긴장이 풀린 발가락 사이로 발톱이 나와있다. 평생 꼭 쥐고 살았던 발가락에 힘이 풀렸다. 꼬리털을 한껏 부풀린 후 움직임이 멈췄다. 다시는 숨을 쉬지 않는다.


한참 동안 그 옆에 있었다. 호들갑 떨며 딸에게 전화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그대로 있었다.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얼마 동안 그러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시간도 잠시 멈춰버린 듯하고 공간도 낯설다.


정신을 차리고는 거실 한편에 미리 준비한 종이 상자에 꼬맹이를 뉘었다. 그리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딸의 퇴근 시간에 맞춰 소식을 알렸다. 목이 메어 말을 못 하는 딸의 한숨소리가 선을 타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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