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 시절을 떠올리며 항공문학상에 도전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이번 달 결과를 기다리다 혹시하며 홈페이지에 들어갔는데 처참히 탈락. 잠시라도 기대했던 마음이 부끄러워진다. 그래도 괜찮다. 도전하는 자가 아름다운 법이라고 나를 토닥이며, 글쓰기를 향한 애정만 잊지 않기로 한다.
빛과 어둠의 언저리에서
승무원으로 지내던 시절, 내 기억에 가장 아름답게 남는 장면이 있다. 저녁이 될 무렵 유럽의 어느 도시를 향해 착륙할 때 창문 너머로 보인 풍경이다. 초록초록한 나무와 숲을 배경으로 빨간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 태양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불그스름한 조명을 온 세상에 비추고 있었다. 어둠이 찾아오기 직전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동화 속 나라로 내려가는 것 같았던 그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렇게 빛과 어둠 사이를 날았고, 실제로 행복과 슬픔의 감정을 넘나드는 시기를 보냈다.
대학교에 다닐 때 교직 과정을 이수하며 교사가 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남동생과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다녀오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길 위에서 여러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게 설렜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알아가는 것이 즐거워진 것이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비행기 안의 승무원들에게 눈길이 갔다. 그들의 일과 삶을 상상해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거다, 새로운 꿈을 꿔보자!’
나의 간절한 바람과 산티아고 길에서 다져진 자신감이 시너지 효과를 냈다. 정말 운이 좋게 그 해에 바로 국제선 승무원이 되었다. 최종 합격 결과를 알게 됐을 때 동네가 떠나가라 날뛰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 또한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축하를 받으셨는지. 이제까지 못 한 효도를 다 한 것처럼 부모님의 행복이 내게도 큰 기쁨이었다.
서울에서 집을 구하고 4개월의 교육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곧 실전에 뛰어들 나를 상상하며 동기들과 즐겁고 치열한 배움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OJT 실습 비행 때 김포-하네다 왕복 노선에서 토를 했고, 시카고 비행에서도 같이 간 동기에게 멀미의 고통을 털어놓았다. 그랬다. 사실 나는 제주에서 서울까지 면접을 보러 왔다 갔다 할 때도 멀미를 심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다. 여섯 살이 되어 처음으로 유치원을 다니면서 짧은 거리도 멀미로 괴로워했던 날들. 비닐봉지를 손에 잡고 힘겹게 유치원 버스를 타고 다녔던 기억이 아련하다. 제주시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서귀포를 방문할 때도 늘 중간에 차를 세워 속을 비워내야 했으며,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는 친구들이 다 배를 탈 때 혼자 입을 틀어막고 내려야 했다. 그런 내가 승무원이라니. 무모한 도전이라 생각했지만, 점점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배꼽 위에 파스도 붙여보고, 편강을 들고 다니며 먹어보기도 했다. 아빠가 나 몰래 내 옷을 넋들이는 데 가져가기도 했었고, 손님들이 복용하는 멀미약도 먹어봤다. 그러나 멀미약을 먹는 순간 승객들의 “딩- 딩-” 콜 알림 소리에도 몸이 안 움직이는, 정신과 육체가 따로 노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잠에 취해 승객들을 응대하는 게 매우 어려웠다. 일하는 사람을 위한 멀미약은 아니었다. 어느 하나 내 멀미를 줄여주는 것은 없었다.
비행을 시작하고 3개월이 되었을 때 그만두고 싶었다. 부모님께서는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 하셨다. 개인 계정에 힘들다는 글을 올리면 “요즘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하고 나를 비아냥거리는 친구도 있었다. 내 처지가 딱 ‘빛 좋은 개살구’ 같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화려하고 부러운 직업이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꼈으니까. 사무치게 외로웠다. 가족도 친구도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불 꺼진 방에 누워 이대로 내 인생의 불이 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즈음 새롭게 팀이 결성되었고, 나는 두 번째 막내로 들어가게 되었다. 신기하게 15명 중 나 말고 자취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팀장님과 선배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열심히 서비스하기에도 벅찬 시간에 멀미까지 하는 내가 얼마나 눈엣가시였을까. 그러나 사무장님들은 늘 “민경, 괜찮아?”하며 따뜻하게 물어봐 주셨고, 선배들은 내가 해야 할 몫까지 가져가 주었다. 특히 호텔에서 늘 방을 같이 쓰던 막내 언니와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로 깊은 사이가 되었다.
팀원을 너무 잘 만난 덕분에 숨통은 트였지만, 멀미가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륙 직전 신문대를 차리며 풍기는 신문과 비행기 연료 냄새는 역하게 느껴졌고, 12시간 이상을 비행하며 내가 고작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는 것은 즉석 미역국과 과일 몇 조각뿐이었다. 잠시 중간에 눈을 붙이고 일어나 양치질하거나 가글로 입을 헹구어도 상쾌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겨우 비행을 했고, 늘 속이 울렁거리는 상황에서 웃으며 손님을 상대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첫 번째 휴식이 끝나고 두 번째 기내식을 제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손님들께 따뜻한 물수건을 나눠드리는데 갑자기 속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올라올 것 같아 선배들께 부탁드리고 화장실을 찾는데 맙소사, 이코노미석의 모든 화장실이 사용 중인 게 아닌가! 앞으로 전력 질주하여 가보니 비즈니스석도 문이 잠겨 있었다. 그날 나는 생에 처음으로 일등석 화장실을 이용했다. 굉장히 넓고 쾌적했는데 자세히 기억도 나지 않는다. 변기를 붙잡고 고개를 숙여 바닥만 바라봤다. 팀원들에게 너무 죄송하고, 이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자꾸만 닦아도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토를 쏟아냈다.
화장실을 나오니 팀장님이 서 계셨다. 나를 보시고는 “이코노미는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좀 쉬다 와라.” 하고 선뜻 자리를 내어주셨다. 이미 서비스가 끝난 상위클래스 갤리에서 선배 언니도 손님들께 드리고 남은 죽을 내게 조금이라도 먹으라고 챙겨주셨다. 괜찮다는 말로 나를 위로해 주면서. 비행이 끝나 다들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민경, 집에 가도 혼자지? 밥 같이 먹고 가자!” 하며 부팀장님께서 밥을 사 주셨다. 나는 무슨 복으로 이렇게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안전과민증을 느끼는 날도 많았다. 유니폼을 입고 출근하던 날 지하철 안에서 성추행을 당한 적도 있었고, 낑낑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오를 때 자꾸만 문을 열어 확인하는 아랫집 남자도 있었다. 새벽 4시 반 출근에 콜택시를 부르면 매번 스산한 음악을 틀고 오시던 기사님. 일부러 친한 척 말을 걸었더니 “어떻게 내 뒤통수만 보고도 아네요.” 하는 한 마디가 무서워 묵주 알을 굴리며 기도했던 출근길도 있었다. 나에게 승무원 시절은 빛과 어둠, 그 어느 사이를 맴돌던 시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상에서조차 유니폼을 입고 목에 단추를 채울 때마다 입안에 토 기운이 퍼져버렸다. 도저히 일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팀을 마지막으로 1년 4개월의 짧고도 긴 비행을 마치던 날, 한분 한분께 정성을 다해 편지를 썼다. 나를 어둠에서 구해준 것은 여러 나라를 오가며 만난 이들과의 대화도, 문화도 아닌 내 곁에서 묵묵하게 나를 지지해준 팀원들이었다.
집 근처에 사는 사무장님 차를 얻어 타고 가던 새벽 퇴근길, 짙게 깔린 어둠 위로 조금씩 차오르는 태양 빛을 보았다.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해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아름다운 여명을 맞이했다. 얼마나 찬란했던지. 빛과 어둠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함께 있기에 그 틈에서 인생을 배우고, 이웃을 존중하는 미덕을 알아가는 것이 아닐까. 사무장님들과 선배 언니들이 그리운 오늘, 여전히 나는 빛과 어둠을 마주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