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XXL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 리뷰
무대는 단출하지만, 의미는 복잡하다. 복잡한 의미를 간결한 표현 안에 함축하여 전달하는 것이 [XXL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의 매력이다.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를 비춤으로써 제기되는 문제의식도 무리 없이 극에 녹아든다. 잘못하면 쉬운 방식으로 소비될 수도 있는 소수자성을 지닌 캐릭터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활용한다. 동시대에 유효한 메시지를 던지며 그것이 결국 관객의 마음에 가닿도록 설계했다는 점에서, 이 극이 ‘메이드 인 극단 돌파구’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XXL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은 전형적인 청소년극이자, 퀴어, 학력주의, 계급과 차별, 성과주의, 가정폭력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사회극이기도 하다. 하지만 채 2시간도 되지 않는 상연 시간 동안 이 모든 이슈를 진중히 고찰하기란 어렵다. 그렇기에 작가는 갑과 을의 경계를 오가는 입체적인 인물들의 입을 빌렸고, 연출은 이에 연극 언어를 더해 대한민국의 현재를 갈무리하여 보여준다.
창작진은 너무나 많은 생각을 소화하려 애쓰기보다는, 하고 싶은 말을 효율적으로 정리하여 전달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니 인물들의 서사가 깊지 않다. 물론 각자 나름대로 전사(前史)를 갖추고는 있으나, 이는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 안에서 제공된다. 그 너머의 이야기는 관객이 직접 생각해보아야만 한다.
극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확연히 다르고. 다르기에 반목한다. 그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연극의 주요 논제를 대변한다. 주제의식이 곧장 무대 위에서 돌아다니며 자신을 보라면서 외치는 셈이다. 사실 인간의 속에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연극은 이를 해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극은 인간의 겉에 둘러싸인 이야기를 탐구하다가, 결국 그 속에 미치지는 못한 채 기승전결을 맺는다.
연극에서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아주 명확하기에, 극을 꿰뚫는 뜨거운 감자를 둘러싼 난상토론은 다소 상투적인 담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연극은 그 담론이 관객의 뇌리에 깊게 박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얕은 서사의 저변을 뚫고 관객 스스로 무언가를 계속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렇게 가치 있는 연극이 된다.
그러니 함께 생각해보자.
‘근육질의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이, 사회적 여성의 전유물인 레오타드를 착용한다.’
이것은 이 극의 주인공 준호를 뜻하는 문장이다. 이 문장에는 여러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
근육질의 몸매는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의 혈기왕성함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적 상징이다. 이 극에서는 준호가 여자친구를 사귐으로써 이성애자임을 드러냈고, 시스젠더로서 행동했다. (그가 젠더 디스포리아를 겪는 듯한 뉘앙스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시스젠더나 이성애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젠더 정체성을 고찰하기 이전에, 준호라는 인물의 설정이 어떻게 쓰였냐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대강 예상해보자면, 첫째는 충격과 관심을 유도하기 위함이겠다. 이 연극의 포스터에서 볼 수 있듯, 와이셔츠를 벗어 던지고 붉은 레오타드를 입은 채 뜀박질을 시작하는 소년의 모습은 관객에게 생경한 광경으로 다가온다.
거울 앞에서 레오타드를 입은 채 근육질의 형태를 들여다보는 준호. 이 광경을 이상하다고 느끼는 관객은 좀체 그의 심리를 파악하기 힘들었을 거다. 비일상적인 감정의 동요는 무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넌 도대체 왜 그걸 입었니?’ 따위의 생각이다. 이는 준호의 의도를 묻는 것이다.
‘의도’란 무엇을 하고자 하는 심리다. 누군가 ‘레오타드를 입은 소년’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레오타드를 입으려는 마음이 들었냐며, 의도를 묻는다. 이를 준호의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에 연관 짓기도 한다. 분명 남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겠지, 라는 마음으로 그의 소수자성이 퀴어 정체성과 연관이 있으리라 판단한다. 이는 극 중에서 준호 주변의 다른 인물이 쉽게 내뱉는 혐오 발언과도 일맥상통한다.
준호의 의도를 부러 파악할 필요는 없다. 준호는 소리 내어 말한다. “그냥 좋아서”라고. 그냥 좋을 뿐이다. 레오타드를 입는 것에 그 이상의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하이힐을 신은 여성을 만나면 의도를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하이힐을 신은 남성이 나타나면 그 행태의 의도를 재단하는 데 혈안이 되어 달려든다. 그게 현실이다.
부끄러워할 사람은 준호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다수자들이지만, 이들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악용하여 권력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 한다. 준호의 친구들이 그렇다. 심지어 준호 또한 남보다 더 나은 가정 형편-유명 건설사 아파트-을 들먹이며 친구를 무시한다. 인물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말이 쉽게 오가지만, 그 본질은 전혀 쉽지 않다. 그것이 명백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새 없이 이야기는 흘러간다.
그 누구도 함부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음해할 수는 없다. 그건 범죄다. 이 극에서는 일종의 혐오 발언이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혐오와 차별을 청소년들의 관계성이 좌충우돌하는 과정에 활용했고, 다수의 관객에게 직관적인 통찰을 주기 위한 대사로서 이용했다. 물론 그 효과는 뛰어났지만, 끊임없이 남의 영혼을 병들게 만드는 단어를 편하게 소비하는 것이 오히려 작위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사회문화적 관습은 때로는 불필요한 억압으로 변모하여 개인의 역량을 저해한다. 이 극은 그 초점을 ‘퀴어’라는 용어에 맞추어 설명하고 있지만, 레오타드를 입는 준호는 비단 퀴어의 관점으로만 해석할 인물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에 미소짓고, 불쾌한 것에 싫증을 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그 본성은 무엇에 기인한 것인가? 나와 다른 모습의 타인을 향한 반감이 당연하다면, 그 반감으로부터 시작되는 혐오의 감정과 피 튀기는 싸움 또한 당연한가? 인류의 역사를 수놓은 전쟁과 파괴의 역사는 필연적이었던가? 지구가 감당치 못할 인류의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 고도로 설계된 심리적 현상이라 볼 수도 있는가?
내가 소중하고 귀하듯이, 너도 마찬가지라는 것. 그걸 다들 자주 잊는다.
나의 딸이 정말로 소중했다면, 딸에게 작년에 생일선물로 주었던 안나수이 손거울을 올해도 또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딸의 안나수이 손거울이 깨질 때까지 억압하고 가르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체대에 들어가고 싶지만, 돈이 없다. 맥도날드에서 일하며 돈을 벌지만, 체대에 들어갈 만큼 힘을 기르지 못했다. 철봉에 단 30초만 매달리면 될 것을, 그 30초를 매달리기 힘들다.
나는 레오타드를 입는다. XXL 사이즈의 레오타드를 입는다. 교복 안에 레오타드를 입는다. 나는 나의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아름답다.
이토록 다채로운 사람들이 무대 위를 넘실거린다. 모든 것이 완벽히 들어맞지는 않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연극이다. 초연과 비교하여 확실히 보완되었고, 지금도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7년의 세월을 거쳤음에도 첫 공연에 머물러있지 않고, 계속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 꽤 묵묵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배리어프리 시스템을 연극 언어에 결합하여 선보인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단 한 명의 관객도 극장에서 소외시킬 수 없다는 다짐이 드러난 연출이었다. 하지만, 아직 소외된 관객이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것이다. 잘 찾아보기를 바란다. 이 연극의 조명은 그 사각지대를 비추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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