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9.23)
-등장인물-
그
그녀
-
무대 왼 편 조명 켜지면, 책상에서 글을 쓰고 있는 그녀 보인다. 책상에는 이면지가 높게 쌓여있고 여러 희곡집들이 주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그리고 책상 한 편에는 차가운 느낌의 조화가 놓여 있다. 그녀는 글을 쓰던 것을 멈추고, 턱을 괴더니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생각에 잠겨 입을 꽉 다물고, 미간을 찡그리고, 머리를 벅벅 긁다가, 얼굴을 아무렇게나 손으로 비벼대는 그녀. 그러다 종이를 구겨 던지더니 느닷없이 비명을 지른다.
[그녀] 어떻게 시작해야 되냐구!!
고개를 푹 숙이는 그녀. 홀린 사람처럼 1인 2역으로 대사를 쏟아낸다.
[그녀] 거기--- 경찰이죠?
[그녀] ---뭔가 두고 가지 않았나요?
[그녀] 그럴 리가!
[그녀] 잊어버린---?
그녀, 볼펜을 다시 집어든다.
[그녀] 잃어버린? 잊어버린? 잊어버린 게 있는 것 같아요. ---아냐, 이게 아냐. ---잃어버린 게 있는 것 같아요. (흥분하여) 그래, 이거지! ‘잃어버린’ 게 있는 것 같아요! (머쓱해져) 내가 무슨 재능이 있어. 그럼 내가 지금 여기 있겠어?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는 법이야. 나도 내 이름 석자는 남겨야 하지 않겠어! (종이에 마구 글자를 끄적인다) 흔적! 흔적을 남길 거야. 사람들이 눈 쌓인 벌판에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도 다 그런 심리라구.
그러나 그녀, 문득 쓸쓸해지는 표정이다.
[그녀] ---누가 내 발자국을 발견하겠어?
깊은 한숨, 커피를 마시려는 그녀. 커피 잔을 집어 들다 자신의 손가락을 유심히 본다.
[그녀] 또 이 모양이네--- (관객에게) 그거 알아요? 볼펜 잉크가 손에 묻는 거, 담배를 피우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해로워요. ---그 전에, 나의 애인이 그렇게 말했었어요. 습관이에요. 알죠? 노트북은 잘 안 써요. 종이에 흔적을 남기는 게 더 생생하니까요. 그것도 잉크가 끈덕지게 뭉쳐져 나오는--- 이 볼펜으로만. 그렇죠? 좋죠? 하긴--- 안 좋아하는 사람도 많아요. 휴지에 일일이 잉크를 닦아내거나. 그보다 요즘 번거롭게 볼펜을 쓰나요, 굳이. ------꽃? 꽃을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이건 그냥 조화죠. 한 때 흔적을 남기고 간다는 게--- 가식적이라서. 왜, 라니 딱히 할 말은 없는데--- 지워지는 흔적 따윈 남기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니,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이유로 손을 씻지 않는 건 아니에요!
그녀는 널브러져 있는 책을 뒤적인다. 무대 왼편 조명 어두워지고, 오른 쪽 조명 서서히 밝아온다. 무대엔 꽃집을 서성이는 그가 보인다. 꽃들은 관객석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 관객을 향해, 그의 독백이 이어진다.
[그] 여자 친구랑--- 반대로 살아보려구요. (꽃을 몇 송이 집어 들어 향기를 맡는다) 이건 무슨 꽃이에요? ---아아. 좋다. 잔뜩 베이면 좋겠죠, 나한테--- 이런 향기가. 꽃을 사주려는 게 아니에요. 쑥스럽게. 그런 건 겉치레라고 생각하는 여자라서. 아니, 가식적이라고 했던가. 사실 왜 꽃을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별 건 아닌데--- 손에 볼펜 잉크 얼룩 투성이에요. 정말이지 자랑스러워하고. 아. 미안해요. 조용히 들어주셔서, 좋아서요. 그냥, 그 끈적이는 볼펜 잉크 냄새도 멀리 했으면 해서, 그래서 그래요. 그러니까요. 집착은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무언가, 충실히--- 사는 느낌이 든다고. 비누로 문질러 씻어야 한다는 게 귀찮은데, 어떤--- 습관이라고, 내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는 그런, 습관, 얼룩이라고. (미소) 저번에 부탁드린 거--- 아아. 고마워요. ---다시, 시작해 볼 거에요.
조명 어두워지고, 다시 켜지면 무대엔 그와 그녀가 마주 서 있다. 그는 꽃다발을 뒤로 숨겨 들고 그녀의 주위를 빙빙 돈다. 그와 그녀는 계속, 서로 미소 짓는다.
[그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아아. 나도.
[그녀] 별거 아닌데--- 무슨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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