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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 프란치스코 Jan 09. 2021

장르극, 코로나19

14. 가난의 기억과 면역의 기억

 슬라보예 지젝은 우리 시대의 가장 논쟁적인 철학자다.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쓴 ‘팬데믹 패닉’이라는 책에서 지젝은 봉쇄조치를 폐기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비판적 자세 아래에는 ‘알고 싶지 않아’라는 태도가 있다고 비판한다. 이 위협을 무시하는 태도는, 앞서 4회에서 인용한 데라다 도라히코의 ‘사태를 두려워하지 않고 넘기거나 두려워하며 지내기는 쉽지만, 적절하게 무서워하기는 참으로 어렵다’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넘기기’에 해당한다. 


 지젝의 이러한 지적은 방역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방역을 강력히 하겠다는 쪽에도 해당한다. 2020년 봄에 아프리카 케냐서 코로나 봉쇄를 위해 사람들을 해산하는 과정에서 13세 소년이 경찰이 쏜 총에 사망하는 등 5명의 희생자가 나왔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했다. 남아공에서도 봉쇄 과정서 경찰에 의해 3명이 죽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사람을 살리겠다는 코로나 봉쇄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바이러스 행성’이 아니라 ‘인간 행성’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너무 두려워 무엇이 중헌지 ‘알고 싶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면, 어쩌랴,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데.


 이미 다 타버렸고, 심지어 누군가가 물까지 부었다고 생각하는 공산주의 논의에 다시 불을 붙이려고 하는 지젝은 서구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 불린다. 위험한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알고 싶지 않아’하는 일들을 알려주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젝은,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자본주의적인 문제점에서 찾는다. 이번 사태의 배경에 신자유주의로 말미암아 공공성이 후퇴하여 공공의료가 붕괴된 것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코로나와 관련된 그의 주장 속에는 바이러스의 특성에 대한 언급이나 ‘지나친 공포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와 같은 말은 없다. 물론 그의 주제가 생물학이나 의료가 아니라 정치와 사회이긴 하지만, 통찰을 지닌 지젝이 이런 태도를 갖는 이유는 그가 유럽에 있기 때문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맞다. 유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누구나 자기가 있는 곳에서부터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당장 눈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만약 지젝이 아프리카에 있었으면 어떤 책을 썼을까? 어쩌면, 말라리아나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는 아프리카가 코로나의 공포를 아프리카의 공포로 만들기 위해 총을 들고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통행금지와 같은 봉쇄조치를 한다면, ‘이것은 코미디다’라고 지젝 특유의 농담을 날리지 않았을까? 그래도 그 봉쇄조치 때문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코로나로 죽지 않았을 거라는 반론이 설득력을 지니려면 아프리카의 코로나 사망자가 많아야 한다. 


 아프리카는 코로나 사망자 숫자가 적은 대륙이다. 글을 올리는 오늘, 2021년 1월 9일 기준으로 통계를 보면, 사망자가 백 명대거나 심지어 두 자리 수인 나라도 제법 있다. 80대 이상이 사망자의 절반을 넘는 코로나의 특성상, 고령자가 많은 선진 세계와는 달리 젊은 인구가 많은 아프리카가 사망자가 적을 수도 있다. 통계가 부실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런 이유와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전염병이 돌 때 그 사회 자체가 보여주는 공포스러운 반응이라는 게 있다. 강력한 봉쇄조치가 그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코로나에 대한 이러한 공포는 수입된 공포가 아닐까? 


 아프리카에서 사망자가 적은 것에 대한 다른 설명은 교차 면역이다. 어떤 질병의 이유는 가난이다. 에이즈의 경우에도 상대적으로 부유한 북아프리카와 가난한 사하라 이남 지역의 에이즈 환자수는 그 차이가 엄청나다. 그래서 에이즈를 영양학적 후천성 면역결핍증후군(Nutritionally Acquired Immuno-Deficiency Syndrome), 네이즈(NAIDS)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가난한 나라는 부실한 영양으로 세균성 질병이나 바이러스성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이미 코로나 바이러스 감기에 여러 차례 감염되었던 아프리카 사람들이, 코로나 감기와 같은 집안에 속하는 코로나19에 대하여 교차 면역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면역 반응을 조사해보면, 코로나19에 걸린 적이 없는 사람들 몸에서 T세포 반응이 나오는 사례가 확인되고 있다. T세포 반응은, 선천 면역이 아니라 특정 항원, 즉 특정한 질병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나타나는 면역 반응이다. 그런데 그 특정한 질병(코로나19)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T세포 반응이 나온 것이다. 어떤 질병을 경험한 사람이 그와 비슷한 병원체에 면역을 갖게 되는 것이 교차 면역이다. 이런 면역 기억이 있으면, 코로나의 경우, 코로나 감기 바이러스에 대한 기억이 있으면, 설사 코로나19에 걸린다 하여도 중증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코로나19 백신을 맞았을 경우에도 설혹 코로나19에 걸린다 할지라도 중증으로 발전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비슷하지 않은 다른 병에 걸렸던 사람조차 그 병을 통해 얻게 된 자연면역이 있으면 코로나19에 대한 저항력이 커진다는 주장도 있다. 이 경우는 광의의 교차면역을 의미한다. 


 어떤 질병의 원인은 가난이다. 그런데 또 다른 어떤 질병의 피해가 적은 이유도 가난일지 모른다. 그 또 다른 질병이 코로나19일 수 있다. 언론에 변종 바이러스의 아프리카 확산세가 커지고 있다는 경고성 보도가 등장하고 있다. 이때도 확산 양상을 보면 유럽과 가까운 북아프리카와, 일찍이 유럽인들이 진출하여 나라를 세웠던 남아공에서 변종 바이러스의 확산이 두드러진다. 북아프리카와 남아공 사이에 낀 나머지 가난한 나라들의 확산세는 그리 크지 않다. 그래서 혹시 가난한 나라들이, 혹은 가난했던 나라들이 질병에 시달린 대가로 면역이라는 선물을 받은 것은 아닐까? 


 우리가 포함된 아시아는 하나의 양상으로 묶이기에는 너무 다양하지만,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일부 지역의 코로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다. 그래서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미국이나 유럽과 치명률에 차이가 있다면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도 차이가 나야 하지 않을까? 두려움이 달라질 때, 전략도 바뀐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안에 가둬둔 ‘팬데믹 패닉’의 봉쇄를 풀고 완화 전략으로 돌아설 때, 우리의 방역정책도 운신의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 사회적 사이토카인의 일부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알고 싶지 않아’의 태도가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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