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너진 자리의 언어

피와 흉터, 그리고 빛

by maggie chae


죽음은 쉽지 않았다.

얇은 와인잔이 산산이 부서졌다.


바닥에 파편이 흩어졌다. 그 위로 발을 내디디는 순간, 보이지 않는 조각이 살을 파고들었다. 짧고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을 찔렀다. 비명은 목구멍에서 막혀 사라졌다. 피가 흰 바닥 위에 뚝뚝 떨어졌다. 붉은 얼룩은 물처럼 번져 나갔고, 핏물의 결마다 빛이 스며들어, 바닥은 잠시 살아 있는 것처럼 떨렸다. 나는 그 앞에서 멈춰 섰다. 아프고 뜨겁고 동시에 차가운 감각,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이 발끝에서 서늘한 맥박처럼 퍼져나갔다.



무너짐은 언제나 상처를 남긴다. 살을 가르는 파편처럼,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피는 침묵하지 않는다. 뜨겁게 솟구쳐 흐르며, 무너진 자리에서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토해낸다. 억지로 꿰맞춘 단어, 빌려 쓴 말들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찢긴 틈에서 새어 나온 숨은 언어가 되어 깊숙이 파고든다. 부드럽지 않다. 위로하지 않는다. 오직 사실만을 드러낸다.


시간이 지난 흉터는 과거의 흔적이 아니었다. 현재형 고통이었다. 손끝으로 더듬으면 아직도 서늘했다. 아물지 않은 살은 미세한 통증으로 살아 밤마다 저려왔다. 오래된 전화벨이 불현듯 울리듯, 불시에 나를 깨웠다. 그 불안한 울림은 내 안을 흔들며 새로운 문장을 찢어냈다. 언어는 치유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아픔이 끝내 남긴 울림에서 솟아났다.


무너진 자리에서 이렇게 피어난 언어는 피뭍은 파편에 가까웠다. 차갑고 단단해, 손끝에 닿는 순간 살을 베었다. 상처를 남기면서도, 동시에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그것은 화해도, 위로도 아니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어떤 목소리였다. 내가 살아 있음을,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일깨워주는.


파편은 흩어져 사라지지 않았다. 빛을 받으면 다른 결로 반짝였다. 그 반짝임은 아직 다 보이지 않는 길의 초입 같았다. 언어는 잔혹한 현실을 베어내면서도, 동시에 다음의 장면을 보여줬다. 나는 그 장면 속 빛을 믿고 싶었다. 상처가 열어둔 작은 틈 사이로, 언젠가 새벽이 스며들 거라고.


새벽은 언제나 그 틈으로 온다.


가장 깊은 어둠이 지난 자리, 가장 깊은 상처 위로 빛이 찾아든다. 언어는 피처럼 진실하고, 흉터처럼 오래 남으며, 새벽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부서진 틈에서 피어난 숨,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의 시작.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