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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 많은 말띠 Sep 25. 2021

친구랑 둘이 제주살이 #2

일주일만 제주에서 살아보는거야.




민치와 나는 대체로 다르지만 등산이라는 취미는 같다. 실제로 민치는 등산 동호회에서 활동 중이기도 한데, 이것 또한 같지만 다른 점. 나는 등산을 좋아하지만 거의 동생과 둘이 다니고 가끔은 혼자 다닌다. 좋아하는 것에 어떤 규칙이나 룰이 생기는 순간 왠지 흥미를 잃어버리는 모난 성격 때문에 취미 생활은 혼자 하는 편이다. 자유롭고 싶어서 혼자 활동하는 것을 선택했지만 혼자라서 생기는 제약도 많다. 뭐든 일장일단은 있는 거니까. 제주살이를 계획할 때 각자 하고 싶은 것이나 가보고 싶은 곳을 적어보자고 했는데, 나의 위시리스트는 대부분 이런 것이었다.






내가 이 목록을 보냈을 때 민치는 딱히 반응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무언의 긍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제주에 온 첫날밤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일 아침에는 송악산에 가기로 했을 때였다. 제주에서 맞는 첫 아침부터 애플워치 활동링 채우기에 여념이 없는 운동인들. 전국의 산이란 산은 다 찍어보겠다는 꿈을 가진 민치와 나는 지난해 등산하기 위해 울산까지 갔었다. 어딜 가든 그 동네 산부터 찾고 보는 우리. 취미가 같은 친구가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는 도무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 등산이라고 하기엔 수줍은 둘레길 코스였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악'자 들어가는 산은 다 어렵다고 했고 '송악산 둘레길'인 것을 보면 산에 가는 것만은 분명했다.












올레길 10코스는 송악산을 빙 두르고 있다. 자연보호를 위해 현재는 송악산 정상에 오를 수 없지만, 이전에는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 같다.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벌써 해가 쨍쨍하다. 산이라고 이름이 붙었지만 가까이서 봐도 낮은 언덕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 송악산. 혹시 몰라 신고 온 등산화가 뻘쭘할 뿐이다. 푸른 초원과 울창한 숲이 바다를 앞두고 있는 풍경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그림 같다. 몽골 사람들은 넓게 펼쳐진 초원과 광야에 살아서 시력이 엄청 좋다던데, 눈이 나빠지기 전에 제주도에 살았다면 2.0시력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성인이 된 후로 줄곧 낮아지는 시력 때문에 여행길에서도 '안경잽이'가 되어야만 하는 슬픈 나는 이 멋진 풍경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얼마쯤 임도를 걷다 보면 너른 초원이 나타난다. 진한 초콜릿색 말이 풀을 뜯고 있는 초원 뒤로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 비현실적인 풍경. 아침에 일어나 걷는 산책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풍경이다. 뜨거운 태양빛도, 허기진 배도 다 괜찮았다. 여름을 싫어하는 내가 이렇게나 여름과 친밀하게 보내다니. 여러모로 오래 간직될 2021년의 여름. 30년의 생을 살아보고 나서야 여름의 맛을 알게 된 기쁨을 하염없이 "우와- 와- 진짜 예뻐! 미쳤어!"라고 말하며 걷다 멈추다를 반복했다.






올레길은 누구나 걷기 좋은 데크로 잘 꾸려져 있다. 평지를 걷다가 계단을 내려가고 또다시 올라가는 데크길을 계속해서 걷는 동안 풍경은 몇번이고 바뀌었다. 이국적이었다가 제주스러웠다가 푸르르다가 반짝이다가 "마! 이게 제주 아이가!" 하는 것 같은 아름다운 장면의 연속이었다. 뭐랄까.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사진 앨범을 들춰보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누군가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기 위해 아끼는 곡들을 모아 만든 베스트앨범이라든지. 우리는 파도가 만든 기암절벽을 보며 신기하다고 감탄하면서 말차 크레이프 케이크 같다고 유치한 농담을 하며 킥킥거렸다.








조식 제공 시간에 겨우 맞춰 자운당으로 돌아온 우리는 시원한 비트 주스를 먼저 대접받았다. 처음에는 색을 보고 히비스커스나 석류인가 생각하고 마셨는데 양배추즙 같은 이상한 맛이 나서 당황하고 있을 때쯤 "몸에 좋은 비트 주스에요~"라고 주인 할머니가 말해주었다. 한참을 지지고 볶으며 조식을 준비하는 할머니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목을 빼고 기다렸다. 공복에  킬로미터를 걸었으니 몹시 시장한 상태였고 맛있는 냄새가 났기 때문에 어떤 음식이 나올까 기대했다. "~ 이거 가지고 가서 드세요" 하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접시를 받았는데 웬걸, 작은 감자 하나와 식빵  조각,   스푼이 전부였다. 내색은 못했지만 '에게- 이게 다야?' 생각했다. 주인 할머니가 마른 이유도, 얼굴에 드러나는 나이에 비해 건강해 보이는 이유도 소식 때문일 거라고 위로하며  접시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있는데 마당에서  귀한 것이라며 복숭아를 내어주신다. 작은 백도 복숭아였는데 마당에서 자라서 그런지 단맛은 덜했지만 신선한 열매 맛이 났다. 그러고는  누군가에게 받은 떡이라며 녹색 찐빵 같은 것도 내어주신다. 방금 데운 빵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났다. 뜨거운 김이 코 안으로 들어왔을 때 어쩐지 쉰내 같은 것이 느껴져서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곧 민치군말 없이  먹는 것을 보고 따라서 먹었다. 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먹고 싶은  아니었다. 결국 반을 남겼더니 그걸 보고 할머니는 떡은   드실 거냐고 물으며 뾰로통해서는 "나나 먹어야지" 하신다.



이날 조식에서는  감자가 단연 압권이었다. 속까지  익은  감자를 다시 한번 노릇하게 구워 올리브유와 굵은 소금을 얹었다. 간단하다면 간단하고 수고스럽다면 수고스러운 레시피지만 적당히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도 좋고 속이 든든하고 편했다. 집에 가면 이렇게 아침을 만들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운당 조식의 특징은 주인장 내키는 대로, 냉장고 사정에 맞게 나오는 무작위성이다. 할머니는 내어주시면서도 내심 걱정이 됐는지 " 이렇게 자꾸 내어주세요~" 하는 나의 인사치레에 "매일 이렇게 드리는 것은 아니고, 오늘은 여러 가지 뭐가 많아서.. 있으니까 드리는 거예요"라고 했다.




땀에 전 몸을 씻어내고 다시 나선 길. 점심을 먹기에는 이르고 멀리 가기도 애매해서 아침에 둘레길을 걷고 돌아가던 길에 본 해안가 도로로 향했다. 씻고 준비하는 동안 이미 출출해져 버린 우리는 간단한 빵과 커피로 배를 채우기로 하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를 찾아갔다. 호텔 1층에 위치한 브런치 카페는 외국인 손님이 많았다. 화려한 샐러드와 건강 주스를 판매하는 곳이었는데 음식이 꽤나 정성스러워 보였다. 맛있는 음식들을 뒤로하고 커피번 하나를 골라 시원한 커피와 함께 먹었다. 일부러 뷰가 좋은 카페로 골라 왔건만 현실은 자동차 뷰.





차가 빠질 때마다 빈틈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쁘게 찍었다. 편안한 소파 덕분에 오래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7월 가계부를 정리하지 못한 나는 여행에 와서 굳이 가계부를 작성하고 민치는 구경했다. 주식 시장을 훑어보다가 투자 정보도 공유했다.(내가 일방적으로 정보를 얻은 편) 날씨가 조금 덜 뜨거웠다면 저 앞 바다에 나가 앉아 있었을 텐데 아쉽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라고 서로를 다독였다. 자동차 사이로 슬쩍 보이는 바다를 이따금씩 바라보기도 했다.



















점심은 민치가 좋아하는 고기 국수를 먹기로 하고 검색해서 찾은 식당에 갔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이긴 했지만 대기 손님이 안 보여서 속으로 '앗싸 성공!'을 외치고 있는데 주인장으로 보이는 걸걸하게 생긴 남자가 "대기 번호 몇 번이세요?"라고 묻는 바람에 김이 샜다. 뒤편 뜰에서 기다리라는 안내를 받고 식당 뒤편으로 가보니 작은 오솔길이 나있다. 오솔길을 지나 뒤뜰로 향하니 뭔가 타는 냄새가 난다. 무엇을 태우느냐에 따라 다르겠으나 나는 나무나 낙엽, 향을 태우는 냄새를 좋아한다. 좋은 냄새는 아니지만 타는 냄새가 나면 마음이 고요해지기 때문이다. 존재하던 어떤 것이 소멸되며 나는 냄새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깨림칙한데 이상한 취향이다. 최근에는 실내에서 향을 태우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해서 자제하는 중이었다. 옷이나 머리카락에 연기가 닿아 냄새가 배면 내 몸에서 나무 냄새가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텃밭이라고 하기엔 큰 규모의 밭은 농작물은 없고 흙이 고르게 가꾸어져 있었다. 닭장과 개집, 귤 나무를 구경하고 있으니 금방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 식당 내부는 주인장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는지 캠핑 용품과 미서부 스타일의 소품, 고전풍의 테이블과 의자가 언밸런스하게 채워진 공간이었다. 테이블의 숫자나 배열로 봐서는 수익성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듯했다. 여유일까 고집일까 생각하면서 국수와 수육을 남김없이 비웠다.






둘이서 먹기에는 확실히 많은 양이었다. 잔뜩 부른 배를 소화 시킬 겸 자운당 할머니에게 추천받은 저지오름을 오른다. 오름은 이름도 어쩜 오름일까. 기분 좋은 발음이다. 저지오름도 올레길 코스 중 하나인데, 숲을 통과하도록 길이 만들어져 한여름에도 걷기 좋다는 추천사를 들었다. 대부분 그늘이고 주변이 전부 숲이라 시원하고 상쾌한 공기를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다. 처음엔 방문객이 우리 둘뿐인가 싶을 만큼 사람이 없다가 종종 한 두 분씩 마주쳤다. 나무와 태양이 만들어내는 순간순간의 장면들은 실로 영화 같기도, 무대 같기도, 그림 같기도 했다. 어떤 순간에는 미리 짜여진 각본처럼 동시에 둘이 같은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온 신경을 빼앗겼다. 나무가 만든 거대한 그늘 아래 빛 한줄기가 깊숙이 들어와있다. 일부러 만든 무대처럼 신비롭고 몽환적인 광경이었다. 이런 무대를 채우는 극은 어떤 내용일까 상상했다. 등장인물은 한 명, 아주 깊은 고독 속에 살지만 그렇게 이어지는 삶의 선상에는 분명히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는 그런 인물의 독백 무대면 어떨까.










가벼운 이야기와 적당히 무거운 이야기를 섞어가며 대화를 한참 이어가다 보니 어느 지점에서 기시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어디를 가던 주변을 살피고 특징을 기억해두는 습관이 있어서 한번 지나온 길은 쉽게 알아챈다. 괜한 기시감이 아니었다. 아까 지나친 곳이 분명하다. 저지오름에는  개의 길이 있다. 오름을  둘러 걷는 둘레길 코스와 정상 부근으로 올라가 정상을 두르며 걷는 정상 코스인데 처음에는 정상 코스를 골랐다. 그런데 표지판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걸어도(사실 표지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도무지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발견하지 못한 우리는 둘레길 코스도 좋은  같으니  길로  걷다가 나가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대화에 너무 열을 올렸는지 이상하게 계속해서 같은 지점에 이르는 것이었다. 분명 표지판이 이끄는 곳으로 걸었고 빠져나가는 길을  봤는데 자꾸만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이한 . 그렇게 3바퀴 반을 돌았을 때쯤 겨우 샛길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곳이 출구임을 알게  것이다. 7월에는 섬에 갇히더니 8월에는 오름에 갇힌 민치와 . '저지오름의 저주'라며  유치한 농담에 여고생들처럼 킥킥거린다.











제주에서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이동하는 길도 관광코스  하나인가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제주의 특별한 자연이 만드는 풍경도 좋지만, 우주가 법칙에 따라 부지런히  역할을 할 때 우연히 마주치는 순간들은 여행객들을 위한 깜짝 선물처럼 예고 없이 나타난다. 해안 도로를 지나다가 구름 사이로 햇빛이 선처럼 쪼개진 광경을 보고 적당한 곳에 차를 댔다. 우리처럼 계획 없이 차를 세운 사람들이 많았다. 연신 사진을 찍어대느라 바쁜 사람들.  틈에 우리도 사진을 찍을만한 명당을 찾아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함이 작은 스마트폰에 조악하게 담기는 것이  그리 중요할까 싶으면서도  순간을 잊게 될까 두려워서 자꾸만 찍어댔다. 넓게 펼쳐진 하늘이 수면 위를 물들이고 구름이 겹겹이 층을 차지하고 흐르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고개를 돌리면 사방이 아름다웠다.






저녁 식사를 충분히 하기 위해서는 바삐 움직여야 하는 코시국의 여행. 우리는 둘째 날도 차에서 일몰을 맞았다. '레이 필터'가 또 열심히 일해준 덕에 그 누구보다 더 불타는 일몰을 봤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완벽한 사바나 일몰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첫날에 먹었어야  고등어회를 먹으러 가는 . 오늘은 거국적으로 한잔하기로 하고 자운당에 차를 두고 나섰다. 걸어서 10 정도 거리에 모슬포항이 있다. 이미 해가 완전히 사라졌는데도 하늘엔 여전히 태양의 흔적이 남았다. 서울에서는 코시국으로 인해  10시까지 영업제한이라고 하면 10시를  채워서 영업을 하지만 제주도의 식당들은 10시까지 영업하는 곳이 많지 않다. 8-9시면 이미  닫는 곳이 태반이. 모슬포항에서 고등어회를 취급하는 가장 유명한 식당이 있지만 대기가 다고 하여 자운당 할머니에게 추천받은 다른 식당으로 갔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조용한 모슬포항을 조금 걷기로 한다.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가 막 세상에 나왔을 때 여수에 갔었다. 그때만 해도 깜깜하고 고요한 바닷가에 주홍빛 전등이 조용히 수면을 비추는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지만. 모슬포항의 밤은 그때의 여수 밤바다와 비슷했다. 얼마 전 지냈던 미조항도 떠올랐다. 고구마네 가족은 지금 뭐 할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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