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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 많은 말띠 Sep 27. 2021

친구랑 둘이 제주살이 #3

딱 일주일만 제주에서 살아보는거야.







자운당 마당의 주인은 흰 닭이다. 처음 이 닭을 만난 것은 제주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아침이었다. 전날 마당에서 정체 모를 짐승의 변과 생쥐 시체를 이곳저곳에서 발견했고, 차에서 내리다가 수풀 사이에서 아이보리색 털을 가진 정체 모를 짐승이 후다닥 도망가는 것도 목격했었다. 후에 주인 할머니께 여쭤보니 풀이 우거진 곳이 주변에 없어 온 동네 개들이 아침마다 자운당 정원에서 변을 보고 간다고 했다. 정체 모를 짐승이 개였다는 사실에 한층 안도했지만, 어쩐지 풀이 무성한 정원이나 마당을 다닐 때는 뒤꿈치를 들고 빠르게 지나쳐 가는 습관이 생겼다. 짐승에 대해 한껏 위축돼있는 와중에 볕을 쬐러 나간 테라스 계단 아래 한구석에 묘한 털을 가진 짐승의 뒤꽁무니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가까이 가기엔 불쾌하고, 정체는 확인하고 싶고 갈팡질팡한 마음으로 조용히 한 걸음씩 다가가 흰 짐승의 머리 쪽을 확인해보니 닭인 것이다. 닭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애매한 위치에 알을 품듯 가만히 앉아 있을 건 또 뭐람. 어쨌거나 평화로운 자운당의 아침. 



이날은 제주살이의 메인 코너라고 할 수 있는 한라산 등반이 예정돼 있어 새벽부터 일어났다. 전날 미리 사둔 샌드위치와 서울에서부터 가지고 온 풋사과, 원두커피로 간단히 배를 채운다. 날이 더워도 정원에서 먹어야 집을 떠나 여행에 왔다는 기분을 담뿍 느낄 수 있다. 소박한 아침이었지만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진 조용하고 평화로운 행복. 눈이 떠질 때 일어나서 조용하고 느리게 먹는 아침이 왜 그리 귀한 것인지. 




우리는 한라산의 다양한 코스 중 영실 코스를 오르기로 했다. 등산 후 운전을 해서 돌아가야 하므로 너무 긴 코스는 제외하고, 3-4시간 정도 소요되는 코스를 기준으로 골랐다. 재작년 즈음에 성판악 코스로 한라산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날이 흐려서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는 거의 안갯 속이었다. 성판악 코스 자체가 워낙 긴 코스인데다, 딱히 멋진 풍경을 구경하며 오를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더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아쉬움을 이번 기회에 달래주겠다는 듯 쾌청한 하늘. 영실코스는 해발 1100m 정도까지 차로 올라가서 백록담 바로 밑까지 등반하는 코스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고 또 오르는데 레이가 힘들어한다. 엑셀을 세게 밟는 일이 거의 없는 민치가 몇 번이고 부아아앙-하고 채찍질을 하지만 소리만 요란할 뿐 영 힘을 내지 못하는 레이. 덩치만 컸지 날렵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레이. 그런 레이를 놀려대며 1100도로를 천천히 달린다.


영실코스 입구에는 2개의 주차장이 있다. 처음 만나는 주차장에서 입장료를 내고, 2-3km를 더 올라가면 등산로 입구 바로 앞에 또 하나의 주차장이 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얼마간 느껴보지 못했던 시원한 바람이 살갗에 닿는다. 이렇게 시원했을 때가 언제였지 싶은 온도다. 8월의 기온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선하다.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아래가 내려다보이지는 않지만 선선한 바람만큼은 이곳이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영실코스의 초입은 나무가 많아서 그늘진 데다 가을처럼 시원하다. 오랜만에 계곡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등산을 하니 없던 기운도 생기는 것 같다. 교가에 자주 등장하는 '~산 정기'가 대체 뭘까 싶었는데 요즘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대강 알 것도 같다. 산에는 보이지 않는 생명력이 가득하다. 그냥 있는 것 같은 모든 것들이 사실은 숨 쉬는 생명이고, 매번 다른 모습으로 그곳에 있다. 느리고 강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주어진 것을 해내고야 마는 그 기운, 기세가 분명히 느껴진다. 그 에너지가 나를 더 건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 그렇게 한라산의 정기를 받으며 20분 정도 오르면 바다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제주도의 풍경이 펼쳐진다. 







울창한 나무로 뒤덮인 산세를 멀리서 보면 그 질감이 꼭 폭신할 것만 같다. 녹색 털을 가진 동물이 웅크리고 누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초코를 만질 때 손끝에 느껴지는 부드럽고 폭신한 촉감을 상상하며 건너편 산을 바라본다. 실제로는 없었는데 카메라에 담긴 둥근 무지개. 아주 잠깐 산길을 걸어 볼 수 있는 풍경이라기에는 다소 과분하다. 인간은 언제나 자연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이 지점부터는 계속 풍경을 감상하면서 계단을 오를 수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르다 보니 천국으로 가는 길인가 싶다. 저 멀리 능선에는 하늘에 닿아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보인다. 



'저기까지 올라야 하는구나'



정면에 보이는 절벽은 병풍처럼 펼쳐졌다고 해서 '병풍바위'라 불린다. 병풍바위의 모습이 계속 달라지는 것을 보며 산을 오르는 재미가 있다. 내가 지나온 길이 뒤에 펼쳐져 있으니 보람도 더해지는 것 같고. 
















제주도에 오름이 300여 개나 된다고 하던데 산에 오르니 그 숫자가 실감 난다. 각기 다른 크기와 높이로 불규칙하게 솟아 있는 오름이 셀 수 없이 많다. 저 멀리 구름이 내 눈높이에서 흐른다. 구름의 모양에 따라 차지하는 층이 서로 다르다. 구름도 무리 생활을 하나. 산, 바다, 땅, 하늘, 구름이 레이어처럼 겹겹이 채워져 있다. 산을 오르는 내내 바람이 세게 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쓴 큰 밀짚모자가 몇 번이고 벗겨졌다. 땀이 났다가 식는 것이 반복되고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한라산을 오를 때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면 해발 고도마다 서식하는 식물이 달라짐을 눈치챌 수 있다. 어느 구간에서 눈에 띄게 많이 보이는 식물들을 아는 척하는 재미가 있다. 병풍바위를 지나면서부터는 성게처럼 생긴 보라색 꽃이 지천에 널려 있다. 뼈처럼 생긴 나무는 백록담에 오를 때도 정상 부근에서 많이 봐서 안면이 있다. 민치는 그 뼈처럼 생긴 나무를 유독 신기하게 봤다. 그 모습을 보고 민치한테 또 말을 거는 나. "저 나무 위에 까마귀까지 앉아 있었으면 진짜 워킹데드 같았을 거야. 그치?" 



나는 이 높은 곳에 이렇게나 많은 꽃과 나비들이 서식한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꽃과 나비는 봄에나 볼 수 있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름에도 어딜 가든 꽃이 많다. 여름이 싫어서 마냥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동면하는 동물처럼 숨어만 지내느라 몰랐다. 담벼락을 수놓는 꽃이, 꿀을 빨아먹는 나비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가 한여름에도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 그 사실이 신기하고 반가워서 꽃과 나비를 볼 때마다 "여기도 있어!", "저기도 있다!" 호들갑을 떨어댔다.





제주에 내려가기 전 관악산을 다녀오면서 목덜미가 다 탔다. 살을 더 태웠다가는 재취업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싶어서 (너무 놀러 다닌 티가 난다고나 할까) 보라카이에서 산 거대한 밀짚모자를 챙겼다. 옷차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밀짚모자를 쓰고 한라산을 누비는 젊은이들. 뭔가 특별함을 더하고 싶어 준비한 나의 작은 이벤트. 이런 것에 군말 없이 동참해 주는 민치가 조금 의외였다. 내리쬐는 햇볕에 피부를 보호할 유일한 방법일 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영실코스는 설경으로 유명한 코스다. 실제로 친동생이 영실코스를 눈 오는 날 등반하고 와서 사진을 보여주며 무진장 자랑을 했었다. 눈으로 뒤덮인 산이 히말라야를 연상케 했다. 여름의 한가운데, 녹음이 짙은 영실 코스를 오르며 그때 동생이 보여준 사진을 흐릿한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다. 눈앞의 풍경과 비교하기도 하고 그 풍경을 찍어 동생에게 곧장 전송했다. 여름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동생의 답을 받고 괜히 뿌듯해진다. 그 이야기를 민치에게 전하니 사시사철 잎이 무성한 침엽수가 많아서 눈이 오면 절경이긴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정상 부근에 도착하니 구름이 눈앞을 지나간다. 팔을 뻗어 손바닥을 펼치면 구름이 내 몸을 통과하며 지나는 것이 감촉으로 선명하게 느껴진다. 제주도의 한가운데 가장 높은 산등성이라 그런지 구름이 빠른 속도로 파도처럼 밀려오고 바람은 점점 더 거세졌다. 혹시 몰라 캐리어에 챙겨 온 바람막이를 숙소에 두고 온 것을 몹시 후회하면서 추위와 싸웠다. 닭살이 돋아 털이 쭈뼛 서있는 것을 민치에게 보여주면 "엇! 진짜 닭살 돋았어!" 하면서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모를 묘한 반응을 보인다. 그 반응을 보는 게 재밌어서 "또 닭살 돋았어" 하고 자꾸 보여준다. 



사진을 찍다가 풍경 속에 있는 민치가 평소보다 더 작아 보여서 '조구미'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어쩐지 일본 여자 이름 같아서 "조구미상~" 하고 불렀더니 민치가 꺄르르 웃는다. 민치가 웃기 시작하면 왠지 더 재밌게 해주어야 할 것 같은 사명감이 든다. 더 깔깔대며 웃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내 일본식 이름도 지어본다. 



"민치는 쪼끄매서 조구미상, 나는 마리만코상"


민치는 처음에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듯 별 반응이 없다. 


그래, 미끼를 물었어. 지금이야!



"나는 왜 마리만코상이게? 말이 많아서 마리만코상이야." 


준비된 일격을 날리니 그제서야 깔깔대며 웃는 민치.


오늘도 성공이다.




이런 아무것도 아닌 걸로 한참을 깔깔대며 장난치는 우리를 보면 주변에서는 그게 왜 재미있는 거냐며 이해하지 못한다. 옛날부터 그랬다. 남들 뒤에서 조용히 유치한 농담을 하며 히죽거리는 아웃사이더 두 명.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것들을 붙잡아 엉뚱하게 해석하는 게, 그런 코드가 서로 통하는 게 민치와 나의 연결고리다. 나는 내가 재미없는 사람이라서 싫은데 민치 앞에서는 왠지 재미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신이 난다. 신이 나서 오버스럽게 주접을 떨면 민치는 여지없이 깔깔거리고 때로는 그런 나를 따라 하기도 한다. 그 모습이 또 얼마나 재밌는지.



구석에 있으니 더 조구맣네 조구미상



구름이 많으면 흐렸다가 걷히면 맑았다가 하는 변덕스러운 풍경을 지나면 윗세 오름에 도착한다. 윗세 오름에서 2km쯤 더 가면 백록담 남벽분기점으로 갈 수 있다. 출출해진 배를 약간의 간식으로 달래고 기운이 난 우리는 남벽분기점까지 더 가보기로 한다. 윗세 오름까지 오는 동안에는 주변에 사람이 계속 있었는데, 남벽분기점으로 가는 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산에 오니 기분이 좋아서 옛날 노래를 몇 곡 불렀다.(가사를 안 보고 부를 수 있는 곡들은 대부분 옛날 노래) 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후렴구부터는 민치가 함께 불러준다. 그러다가 제목은 아는데 멜로디는 모르는 그런 곡이 갑자기 듣고 싶어져서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켰는데 저 멀리 어떤 아저씨가 우리를 의식하며 다가온다. 의식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냥 지나치는 듯했다. 어깨가 스치는 바로 그 순간에 시선은 다른 어딘가에 두고 무언가 말을 하는 아저씨. 가만 들어보니 '소음공해로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으니 음악은 이어폰으로 들어라' 하는 경고였다. 가방에는 '불법행위 순찰 중'이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면서 무시무시한 경고를 주고 떠난 그 아저씨를 민치는 '매우 숫기없고 소심한 성격이지만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싫은 소리를 해야만 하는 공무원'인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미안합니다)










숫기 없는 아저씨의 경고 후에는 음악을 틀지 않고 직접 부르기로 했다. 안개인지 구름인지가 자욱한 길을 적막 속에 걷자니 무료해서 생각나는 노래는 다 불러본다. 그중에는 소찬휘의 <Tears>도 있다. 악을 쓰며 부르던 노래를 조용히 부르려니 김치 없이 라면을 먹는 것처럼 괴롭다. 그래도 역시 후렴구는 민치가 함께 불러준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남벽분기점에 다다랐는데 백록담은 보이지 않고, 이상한 아저씨가 말을 걸어서 다시 되돌아가기로 한다. 











오른쪽에 솟은 것이 백록담




돌아가는 길에는 시야가 걷히면서 점차 화창해졌다.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백록담도 나타났다. 바로 옆에 백록담이 있었다니! 맑게 갠 후의 풍경은 '천국'이라는 표현 외에 마땅한 표현이 없다. 나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죽고 나서 이런 세상으로 오는 것이라면 죽음도 견딜만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덕을 오르는 계단이 하늘로 향하는 계단 같다. 건강한 두 다리와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런 곳에 올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반드시 건강하게 늙어야 할 이유가, 의욕이 또 생긴다. 



"나는 정말 건강하게 늙고 싶어. 


요즘에는 암 안 걸리는 사람이 없잖아. 


어차피 인생에 한 번은 겪어야 할 암이라면 


이왕이면 젊은 나이에 왔으면 좋겠어. 


젊으면 회복도 더 빠르고, 살려는 의지도 강하니까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거 아니겠어." 



이런 얘길 민치에게 했더니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며 "건강하자"고 하는 민치. 

















분명히 아까 지나온 길인데 맑아지고 나니 또 다른 곳처럼 느껴진다. 시선을 두는 모든 곳이 아름다워서 몇 발자국 걷다가 멈추다 했다.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다니. 알프스가 따로 없다. 가격 대비, 이동시간 대비 만족도 10000% 여행지다. 삼각대를 두고 둘이 함께 있는 사진도 찍고 촌스럽게 점프도 해본다. 인플루언서 스타일로 찍어보자는 의욕은 강했으나 결과물은 뭐.. 그렇다. "뭔가 잘못되었다면 피사체 탓이야, 이만하면 충분해"라고 나 자신에게도 민치에게도 최면을 건다. 천천히 이 멋진 현실을 눈과 마음과 사진에 차곡차곡 담으며 다녔더니 평균 3-4시간 정도 소요되는 코스를 5시간을 훌쩍 넘겼다.





선명히 보이는 백록담




민치와 한참 대화를 하며 내려오는데 수풀 사이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너무 놀라서 그대로 멈춰버렸다. 불과 2-3미터 거리를 두고 노루와 내가 정면으로 마주친 것이다. 좁은 길이라 일렬로 걸었고 나는 선두에 있었다. 노루도 나도 서로 놀라서 둘 다 그대로 얼어버렸는데, 잠시 후 노루가 먼저 바스락거리며 도망친다. 멀리 가진 않았을 거라 믿고 수풀 사이를 자세히 보니 저 멀리 노루가 보인다. 이 노루를 만나기 전에 고라니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던지라 우리는 고라니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가던 분이 "노루에요. 노루" 하고 알려주셨다. 눈이 정말 크고 까맣다. 나무에서 뭘 따먹는지 사람들이 모여서 소란스러운데도 개의치 않는다.







병풍바위 주변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어 숲속에서 나는 새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 자연이 만든 진짜 서라운드. 명상 테이프에서나 들어본 그런 소리를 현실에서 듣다니. 예쁘고 고운 소리다.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자연 다큐를 만드는 사람들의 행복 지수가 매우 높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런 환경에서 일을 하는 것도, 자연의 모습과 소리를 담아서 가공하는 일도 정말 행복할 것 같다. 






방문객 중에는 꽤 나이 든 할머니 무리도 보인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할머니신가 보다. 우리 엄마도 딱 저 만큼만 건강했다면 올여름 더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엄마와 산에 다니던 시절이 한참 오래전처럼 아득하다. 너무 젊은 나이에 약해진 엄마.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잠시 생각하다 관두기로 한다. 괜히 등산화를 신고 와서는 데크길만 주구장창 걸으니 발바닥이 아파온다. 산에서는 흙을 밟고 싶다. 잘 닦인 길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고 하면 너무 이기적인가. 하산길에는 조금 지쳐서 거의 말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하산 후 더 급격히 몰려온 허기. 영실 입구는 산속에 있는지라 문명사회(?)로 나가려면 차를 타고 한참을 나가야 한다. 인내심의 한계는 30분 남짓이라고 생각한 우리는 현재 조건에 맞는 식당을 빠르게 검색했다.(거리 매우 중요) 목적지를 정하고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가는데 코너를 도는 순간 저 멀리 도로 한가운데 시커먼 뭔가가 있다. 차는 계속 주행 중이었으므로 그 검은 물체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쫑긋 선 두 귀와 튀어나온 주둥이, 단단하고 큰 체구까지 영락없는 멧돼지다. 멧돼지가 우리 차를 정면으로 서서 노려보고 있다. 차는 멈추지 않고 멧돼지에게로 달린다. 민치는 '저 멧돼지가 차로 달려들면 어쩌지. 그냥 치고 가야 하나, 핸들을 꺾어야 하나' 생각했고, 나는 '사진! 사진! 빨리!' 하고 생각했다. 얼른 아이폰을 집어 든 순간, 멧돼지가 갑자기 달아나기 시작한다. 도로 옆 숲으로 도망친 멧돼지는 더 깊은 숲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주 빠른 속도였다. 차 안에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리다. 






30분 미만의 거리에 나름 리뷰가 좋은 돼지 고깃집에서 정신없이 배를 채웠다. 아침에 나갈 채비를 하면서부터 아니 지난밤부터 '등산하고 바로 바다에 풍덩 빠져버리자'고 여러 번 다짐했었기 때문에 배를 채우자마자 가까운 중문 해변으로 향한다. 우리가 갔던 식당이 중문에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다.(중문은 관광 단지니까 사람이 많을 거라고 예상해서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역시나 주차장 입구부터 북적이더니 해변을 가득 메운 사람들. 이 전까지만 해도 가는 곳마다 한적해서 공항에서 본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 갔나 싶었는데, 여기 있었구나. 멋진 몸매의 젊은이들과 외국인들, 단란한 가족들까지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틈 사이를 빠르게 지나쳐 해변으로 갔다. 




막 바다에 몸을 던지려는데 안내 방송이 나온다. 해수욕장 이용 시간이 끝났으니 나가란다. 아무리 원칙주의자인 나라도 해변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순 없다. 저 멀리 안전요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해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어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잠깐 몸이라도 적시고 나가자"는 나의 제안에 민치는 "그럴까!" 하고 내 뒤를 따른다. 생각보다 거친 물살에 우리는 몇 발자국 들어가지 못하고 멀뚱히 서버렸다. 서퍼들은 안내 방송에 개의치 않고 여전히 서핑을 즐기고 있다. 무릎까지 오는 깊이에서 발을 담그고 가만히 선 채 그저 다가오는 파도를 맞고 있는 모습이 처량하기도, 우습기도 해서 한참을 웃는다. 어쩌다 큰 파도가 오면 목 아래까지 물살이 들이쳤다. 물살이 세면 바닥에 있는 모래가 소용돌이치면서 흙탕물이 되고 그 모래들이 속옷 아래까지 속속들이 들어찬다. 모래인지 바닷물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 물살에 한참을 얻어 맞고서야 바닷물에서 나왔다.



이른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 그런지 처음으로 저녁에 여유가 생겼다. 일찍 귀가하니 다른 방 손님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경쟁자 없이 바로 씻을 수 있었다. 반바지를 입고 산행을 한 민치의 다리가 화상으로 벌겋게 익어 알로에 겔을 빌리러 주인 할머니에게 가니 알로에 겔은 물론 시원한 청귤차를 내어 주신다. 청귤차를 마시며 산에서 만난 멧돼지 이야기를 했더니 썩 놀라지도 않는 눈치다. 할머니도 운전하다가 멧돼지를 만난 적이 있단다.



"나도 그때 멧돼지를 피해서 그냥 왔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멧돼지를 쳐버릴 걸 그랬나 싶은 거야.


내가 그걸 다른 사람한테 얘기했더니 멧돼지 치면 차가 무지하게 상한대.


멧돼지 값보다 차 수리비가 더 나온다는 거 있지."




나중에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멧돼지가 차에 부딪히는 힘이 1톤 정도 된다고 했다. 웬만한 접촉사고보다도 큰 충격 아닐까. 아무튼 노루와 멧돼지를 하루에 다 만나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니까 이번 여행에 행운이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하루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민치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원을 끄듯 잠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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