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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 많은 말띠 Mar 06. 2022

#1 백수와 직장인은 종이 한 장 차이다.

5개월 차 백수, 정신 차려보니 팀장이 되어 있었다.


3년 2개월의 '존버' 막을 내리다.


소소 기업 대리로 3년을 가부좌 틀고 앉아 있다가 문득 이렇게 고여있다가는 썩은 물이 되겠다 싶어 사표를 던졌다. 깍듯하지 못하고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고 업무영역에서만큼은 눈에 띄게 인정받아야만 하는 고약하고 오만한 성격인 내가 사회생활에서 유일하게 내세울만한 능력은 '존버'정신이었다. '회사가 다 똑같지 뭐', '시키는 대로 하라는데 뭐. 해달라는 대로만 해주면 나야 편하지', '이직하면 1년 치 퇴직금 다 날리는데 하루라도 더 다니자'. 그런 마음으로 버텼다. 동료들이 한 명, 두 명 계속해서 떠날 때마다 숱하게 흔들렸지만 그래도 남는 쪽을 택했다. 이 회사에서 나만큼 싼 값에 일 잘해주는 직원 구하기 힘들 거고, 그게 회사를 향해 갑질할 수 있는 나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모두가 떠나고 혼자였다. 온라인 사업부 전체를 나 혼자 떠안고 나서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었다. 이 퇴사로 인해 깨달은 교훈은 첫째, 나는 절대 동료 없이 일할 수 없는 사람이고 둘째, 성장하고 있더라도 비전이 없는 회사는 참을 수 없으며 셋째, 할 수 있는 일을 못하게 하는 환경에서 가장 짓밟힌다는 사실이다.



실컷 놀고 나니 다시 현실이다.


그렇게 오래 버틴 만큼 퇴사 후 수개월이 지나도록 재취업의 의사가 없었다. 누군가는 '한창 남들 열심히 일할 때 너무 오래 쉬는 것 아니냐'라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억지로 직장에 나갈 필요는 없지 않으냐. 급할 것 없다'라고 했다. 나는 어떤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라고 답했다. 정말 다 맞는 말이었다.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말을 가져다가 합리화 용도로 써버리면 그만이었다.



머리와 마음은 늘 반대 방향으로만 향한다. 재취업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 업계를 떠나야 하나' 지레 겁먹으면서도 회사라는 조직에 다시 몸을 담기는 싫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본색을 드러낼 듯 드러내지 않고 조직의 목표를 위해 각자의 역할을 하며 하루 종일 앉아있을 사무실의 무거운 공기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나에게 주어지는 연봉의 대가를 매 순간 증명해내고, 그 이상의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떠안기 싫었다. '꼭 직장이 아니더라도 입에 풀칠은 하면서 살 수 있지 않나?' 하며 프리랜서 시장에 눈을 돌리기도 했지만 어디 소속 없이 남의 돈 벌어먹기가 쉬운가. 세상 어디에도 직장인 월급만큼의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방법은 없다.(적어도 양지에서만큼은)



하루에도 몇 번씩 프리랜서와 재취업의 갈림길 앞에서 서성이며 불안증에 시달렸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계속됐다.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스마트폰을 손에 꼭 쥐고 환하게 빛을 내고 있는 채용 공고를 하염없이 봤다. 스마트폰 앱이 아니라 신문이었다면 꼬깃하게 낡아 휴지처럼 부드러워졌을 거다. 아까 본 공고를 다시 보고 또 봤다. 채용 공고 안에 무슨 정답이라도 숨겨져 있는 것처럼.


"이 직무는 하고 싶지 않아."

"이런 직무는 내가 못해낼 것 같아."

"여긴 경력이 모자라네."

"이 브랜드는 지금도 마케팅을 잘하고 있는데, 내가 이 것보다 잘할 수 있을까?"

"당장 면접 보러 오라고 하면 어쩌지?"

"여긴 면접을 두 번이나 보네? 중간에 떨어지면 시간낭비잖아?"


스스로를 저평가하면서 지워나간 기업들만 수두룩했다. 이 커다란 사회에서 나란 존재는 너무나도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존재인 것 같았다. 나의 단짝 고구마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내게 호통 쳤다.



"야 채용 공고 그거 그렇게 써놨어도 별거 없다! 일단 넣어봐라. 돈 드는 일도 아니잖아? 니가 경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요즘 청년들이 일을 안 하려고 해서 지원자도 별로 없다드만. 회사에서 사람 채용할 때 이력서 보면 딱 보인다. 일단 넣어보고 안되면 말고 되면 좋은 거 아이가? 무슨 넣어보지도 않고 징징거려싸노?"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에 내놓지도 않고 나 스스로 가능성을 재단할 필요는 없는 건데. 참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세상이 나를 똑바로 봐주기도 전에 나는 춤출 수 있는 내 팔, 다리를 다 잘라버렸구나. 친구의 '근거 없는 자존감'을 마주할 때면 늘 반성한다. 부딪혀봐야 알고, 실패해봐야 성장한다는 것을 꽤 오래 잊고 살았다. 그 통화 한 번으로 '근자감'이 생긴 나는 밤 열두 시에 스크랩해둔 기업 몇 군데에 지원했다.



마음 놓고 있을 때, 올 것이 왔다.


몇 군데 이력서를 넣었을 뿐인데 쌓여둔 일을 해치운 것처럼 후련했다. 구직 활동을 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뭐라도 해낸 듯이 평화로워졌다. 이제는 백수생활도 익숙해져서 나름의 루틴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이력서를 넣은 사실조차도 잊었다. 어느 날 산책을 하는데 울리는 전화기. 고구마였다.


"야 백수! 뭐하냐? 할 일 없으면 내려와서 내 일 좀 도와라. 일이 너무 많아서 엄두가 안 난다."


겸사겸사 좋은 제안이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도 만나고 좋은 공기도 마시고 친구에게 도움이 된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또 얼마나 눌러앉으려나' 하고 기약 없는 남해행 버스에 올라 서울을 막 출발할 때, 올 것이 왔다. 서류 합격 문자였다.


'내가 이런 공고에도 지원을 했나?'


마케팅팀 팀장 공고였다. 팀장이라니. 내가 무슨 자신감으로 팀장 공고에 지원을 했을까? 게다가 서류합격이라니. 면접을 어떡한담. 남해에 내려가는 가뿐한 마음이 일순간에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면접 보지 말까? 하는 생각도 잠시 스쳐 지나갔다.


"오이! 출발했나?"


고구마의 메시지에 답하지 않고 얼른 전화를 걸었다.


"야! 나 큰일 났어! 지난번에 지원한 회사에서 면접 보래!"

"헤? 진짜? 잘됐다! 언제 보자 하는데?"

"몰라! 면접 의사 있으면 연락 달라는데?"

"야! 무조건 봐라! 떨어지더라도 봐야지. 연습이다 생각하고 봐라! 다 경험이다."

"그럼 나 남해 내려갔다가 바로 서울 올라와야 될 수 도 있는데?"

"그게 문제가? 당장 면접 본다 해라!"


연락을 받은 때는 금요일 오후였다. 팀장이라는 직급의 무게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는 부담감에 어떻게든 답을 미루고 싶었다. 고구마는 남해에 도착하자마자부터 호들갑을 떨었다.


"면접 본다고 연락했나?"

"아니"

"빨리 해라! 뭐하노?"

"아 할 거야!! 내일까지 생각 좀 해보고"

"뭔 생각을 하는데? 니 고민하다가 또 안 본다고 할끼제?"

"아.. 아니... 볼 거야! 본다고! 어차피 지금 퇴근했을걸. 다음 주에 답해도 돼."

"미칬다. 그게 다 인상이다. 이왕 보는 거 빨리빨리 답해줘야 좋게 보지."


그 후로도 시시각각 "답장했나?" 물어보는 고구마 덕에 등 떠밀리듯 답장을 보냈다. 면접 의사를 밝히니 다행히 온라인 화상면접으로 진행한다고 했다. 어떻게든 남해에서 오래 머물고 싶었기에 화상면접이 반가웠지만 면접이 가까워올수록 대면 면접이 더 나을 뻔했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하는 게 여간 쉽지가 않았다. 시선처리도 어렵고, 말투도 어색했다. 화상면접이 처음이라 유튜브를 뒤져가며 면접 꿀팁을 찾아보고, 6번의 화상면접에서 올 합격을 거머쥔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면접을 준비하는 동안 고구마는 내내 옆에 붙어서 모든 준비를 도와주었다.


화상면접 당일, 여전히 백수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긴장을 다스렸다.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더 놀아서 좋고, 합격하면 그것도 나름 좋은 거지 뭐.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 알아간다고 생각하자. 그런 내 마음과 달리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다. 화상면접은 ZOOM을 통해 이루어졌다. 조작법이 익숙지 않아 여러 번 연습을 했는데, 결국 입장할 때부터 오디오 연결을 못해서 우왕좌왕했다. 그 덕분에 마음은 더 엉망인 채로 어색하게 면접을 진행했다. 준비한 내용의 반도 이야기를 못했고, 몇몇 질문은 예상치 못했던 터라 어떻게 대답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약 15분 간의 면접이 끝났을 때는 '망했다'는 생각뿐이었다.



면접 종료 후 담당자와의 통화에서 "말씀 잘하시던데요" 하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내 마음은 줄곧 불합격을 확신했다. '좋은 경험 했다' 치고 긴장도 풀 겸 고구마와 외식을 했다. 한 잔 술로 면접의 기억은 잊고 옛 추억을 떠들며 저녁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최종 합격 연락을 받았다. 직전 연봉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제시했는데 원하는 연봉도 맞춰주었고(직전 연봉이 말도 안 되게 낮긴 했지만) 면접 결과도 우수하다고 했다.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은 내가 이제 팀장이라는 것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백수 나부랭이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던 내가 다시 직장인, 게다가 팀장이라니. 인생 참, 살고 볼 일 아닌가. 밤잠 설치며 고민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가족과 친구들의 축하와 응원에 기뻤고, 생애 첫 팀장 자리에 대한 무게감에 걱정이 앞섰다. 나 한 사람의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던 것만도 벅찼는데 팀 리더로서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지금부터 뭘 준비해야 하지? 정말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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