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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흥준 Oct 31. 2021

연극 이야기 9_로드킬 인 더 씨어터

연극의 재현 윤리에 대하여

여기는 당연히, 극장

여기는, 당연히 극장

여기는 당연히 극장,

반 점의 위치에 따라 짧은 구절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극장을 창조해내고,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을 또박 말하기도 하고, 서 있는 우리의 이름을 당당하게 외치기도 한다.


우리는 두 발로만 걸어다니지 않는다. 네 발로 걷기도 한다. 앞 발과 뒷 발을 시계추처럼 움직이며 무대 위를 활보할 수도 있다. 극장 위의 자아를 동물에게로 확대하며 배우들은 동물 주체를 재현해낸다.


하지만 연극은 재현 윤리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무언가를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미감은, 조심스럽게 다가가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란 긴장마저도, 재현되는 대상을 다시금 마음껏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상화할 뿐이다.


재현과 구경꾼이 가득한 연극 무대는 그러므로 해체되어야 하는가.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시화해내며, 정치적 상상력을 만들어낸다면 그것 나름으로 연극의 동시대적 윤리를 다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물어야 한다.

“꼭 그것을 무대 위에 올렸어야 하는가”

“타자의 고통을 더욱 잘 보이게 해야 했는가”

“그것을 재현하려는 너는 도대체 무엇이냐”


해체의 기로 사이에서 흐릿해지는 연극을 다시금 무대 위로 등장시킨다. 다시 말해 공연은 ‘연극이 고통을 재현하는 방식’ 을 재현하는 메타-재현의 형식을 통해 연극의 윤리성을 관객에게 묻는다. 군중과 민중을 구분할 수 없는 ‘보여지는’ 것들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보여지는’ 것의 윤리를 다시금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메타-재현 방식은 무대 위에 투명한 유리창을 내세우며, 아무리 닦아 얇아지고 없는 듯 보여도 분명히 존재하는 벽을 상기시키며, 재현이 가능한 극장의 안온함을 폭로한다. 이 안온함은 극장에 한정되지 않는다. 바라볼 수 있었던, 바라봄으로써 군중이자 민중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모든 존재의 안온함을 폭로해낸다.


안온함을 지켜내는 유리창에 새들은 머리를 박고 죽는다. 단지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려 했을 뿐인데 죽고 만다. 투명한 유리창 앞에서 죽어가는 동물은 그 뿐이 아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떠나는 동물, 가보지 않은 곳으로 가기 위해 훈련 받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기 위해 훈련 받던 동물, 죽고 먹히기 위해 태어나는 동물, 내일을 상상하기 어려운 동물이 투명한 유리창 앞에서 죽어간다.

유리창은 아무리 투명해도 얇을 수 없다. 거대하게 두껍다.


죽어가는 것을 당장 살려낼 수 있다는 미감을 품는 이상 세계는 종료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종료되기 직전 우리는 다른 말 대신 오직 미안하다는 말로 울부짖어야 할지 모른다. 나의 존재와 바라봄 그 자체가 미안한 일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단지 이 곳에서 저 곳으로 건너가고 싶었던 것 뿐인데.


내일 울지말자,  곳에서  곳으로 건너가 내일의 호흡을 상상해보자, 그런데 나는 이런 말로 글을 끝마칠  있을까. 가장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앞에서 나는 차마 위의 말들을 꺼낼  없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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