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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흥준 Dec 20. 2021

연극이야기11_김수정입니다

실격당하지 않기 위해 연극을 했어요

김수정 연출을 동경했습니다. 김수정 연출의 연극을 즐겨본다는 사실이 나에게  트로피 같았어요. 대학로 곳곳에 걸려 있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동시대 문제를 첨예하게 다루는 김수정의 연극을 좋아한다고 하면  지적이고 생각 깊은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거든요. 무슨 연극 좋아해? 누가 물어볼 때마다 구자혜 연출과 김수정 연출의 작품을 번갈아 말했습니다. 아는  뭐도 없으면서 지적 허영심에 가득 찼던  같고, 아마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같이 연극을 보러가는 애인에게 김수정 연출이 만든 극의 특징을 설명해주려 했는데, ‘어딘가 찝찝한 축제’ 같다고 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해서 보게 되지만 극장을 나올 때면 어딘가 불편하다고. <김수정입니다> 도 마찬가지입니다. 극에 빨려 들어간 채로 집중해서 보다가, 왠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을 가진 채 극장 밖으로 나왔어요.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불편함의 원천은 솔직함 같았습니다.


<김수정입니다> 는 솔직한 연극 같아요. 연말 시상식을 연상케 하는 무대 구성과 과도하게 꾸민 의상을 입고 김수정 본인과 배우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전혀 비현실 같지 않습니다. 연극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극단 신세계 연말 시상식 자리 같았어요. 그렇게 연극은 비현실의 공간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꼭 오늘을 만들어낸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어 ‘지금-여기’를 관객과 나누는 듯 했습니다.


타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연극보다 어려운 건 자아를 보여주는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 경험과 감정을 바탕으로 쓴 캐릭터를 직접 연기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이 역할을 ‘나’ 로서 수행해야 할지, 아니면 전혀 모르는 제 3자라고 생각하며 수행해야 할지 쉴 새 없이 고민했습니다. 대사 한 줄에 담겨있는 내 역사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저도 모르는 새 연기는 안 하고 제 안의 부정성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내 자아를 유지한 채 연기하는 일은 나의 취약함을 마주하는 일 같습니다. 이런 나를 만들어버린 트라우마 혹은 콤플렉스, 잊고 싶은 기억들. 그것들을 꽁꽁 싸매고 있는 방어막들을 다 마주하다 보면 결국 제가 가진 취약함이 드러납니다.


<김수정입니다>는 김수정과 배우들 각자가 가진 취약함을 말하는 자리입니다. 취약함 안에는 가득 두려움이 들어있습니다. 자기의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질문할 수 있지만, 타자와 함께 취약함을 나누는 일은 좀 다른 의미를 갖는 듯합니다. <면역에 관하여>를 쓴 율라 비스는 “우리는 서로에게 몸을 빚지고 있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취약함은 당신의 취약함과 별개의 것이 아니며, 그것들이 함께 나누어질 때 우리는 함께할 수 있는 앞으로의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함께할 내일을 상상하는 일이 이렇게 깔끔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봉합되지 않은 적대와 불화들이 우리 사이에는 가득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불화와 적대는 우리가 가진 최대의 취약함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이의 빈틈, 평생은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과 겪는 불화는 저에게도 가장 아픈 일입니다. 서로에게 준 상처들을 대사화하여 무대에서 발화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용기와 찢어짐이 있었을까요.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무대 위에서 발화될 때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을 더욱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건 관객 뿐 아니라, 무대 위 배우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무례하지만 생각해봅니다.


서로를 자세히 바라보는 일은 문제를 봉합시키지는 못해도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런 상처가 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고 서로를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저는 <김수정입니다>를 보고 극단 신세계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졌습니다. 더욱 솔직한 작품이 나올 것 같거든요. <김수정입니다> 공연을 통해 알 수 없었던, 어쩌면 알 필요 없었던 일들을 많이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던 환상과 동경도 조금은 금이 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좋고 기다려집니다. 이제는 저와 닮은 점이 많은, 그래서 더 정이 가고 보고 싶은 연극을 만들어 줄 것 같거든요.


비록 김수정 연출님은 공연에서 “연극이 재미없어졌다고, 잠시 연극을 쉬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는 돌아옴을 저는 기다리고 싶어졌습니다. <김수정입니다> 는 <김수정이었습니다> 가 아니라 <김수정입니다> 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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