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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흥준 Jan 25. 2022

책 이야기_7

작별하지 않는다/한강/문학동네

동물 고통의 재현과 연극의 윤리에 대해 글을  적이 있다.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가 내가 아닌 타자로서의 동물 주체를 다루고, 그들을 무대 위에서 재현하는 것은 윤리적인 일인가? 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작성한 글이었다. ‘재현윤리라고 일컬어지는 엄준한 윤리성은 비단 연극  아니라,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예술 장르가 가진 고민이자 과제일 것이다. 만약 도로 위에서 죽는 동물의 고통을 드러내어 인간의 폭력성을 고발하겠다는 (정치적) 목표로 연극을 만든다고 하자. 관객들이  깊은 공감을 얻을  있도록 비명을 지르거나, 다리를 절뚝거리거나. 붉은 조명을 강하게 연출하여 고통을 형상화하는 것은 과연 윤리적인 일인가.


 “고통을 드러내어 관객의 공감을 이끌고 더하여 예술성을 극대화하겠다” 는 목표는 창작자의 미감 속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즉 창작자의 예술적 목표 하에서 이루어진 재현은 불완전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는 재현/대의 불가능성과도 맞닿아 있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이 담론적 폭력을 당하지 않고서는 표상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부여된 이름”*을 일컫는 ‘서발턴’ 이라는 명명처럼, 타자화된 존재를 이름 붙이고 표상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존재와 표상 사이의 균열을 드러내 보여주기 마련이다. 이러한 불가능성과 한계 앞에 나는 연극 예술의 대안으로 ‘애도하는 연극’을 제안했다.


 연극(혹은 예술)의 사후적 이미지는 부재한 것을 재현하기에, 필연적으로 온전할 수 없지만,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자들도 말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제공해줄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미지가 사라져 연결이 끊긴다면, 지금 – 여기에 보이지 않음이 그것의 부재를 구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미지를 생산해낼 수 있는 연극은 부재한 존재에 대한 애도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바꿔 말하자면 애도를 위해서 무엇이 부재한지, 부재한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부재를 구성했던 요인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면, 연극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위의 주장에서 연극을 문학(혹은 소설)로 바꾸어보자. 과거의 시간을 이야기를 통해 사후적으로 재현하는 문학의 존재이유가 애도라면, 한강의 소설은 존재해야 마땅하고, 가장 오래 남아 존재해야 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오월 광주를 비롯한 역사와 기억을 적어내는 작업을 계속해 온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가 나에게 커다랗게 다가온 이유 역시 그것이 가능케 하는 애도 때문이다.


 소설은 오월 광주를 글로 옮긴 작가 경하와 영상 작업을 하는 인선, 그리고 인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전한다. 경하와 인선은 아흔 아홉 개의 통나무를 제주의 땅에 심고, 그것을 촬영하는 프로젝트를 하자고 뜻을 모은다. 경하가 모르는 사이 작업을 이어 가던 인선이 작업 중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하고, 인선을 대신하여 그녀가 키우던 앵무새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눈보라가 치는 제주로 향하는 경하의 목소리로 소설은 전개된다. 허나 경하가 눈보라를 뚫고 인선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경하의 앵무새는 숨을 거둔 이후였고, 정신없이 앵무새를 묻어두고, 경하는 잠을 청한다. 잠에서 깨어난 경하를 인선이 찾아오는데, 잠에서 깨어난 세상에는 죽었다고 생각했던 앵무새도 멀뚱멀뚱 살아있다. 꿈인지 현실인지, 생인지 사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경하와 인선은 통나무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인선의 발화를 통해 전개되는 소설은 어느새 인선 어머니의 목소리를 전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세 인물의 공통점을 꼽자면, 세 사람 모두 두 개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두 개의 삶을 살게 하는 환상성은 앵무새라는 존재로 은유되는 듯하다. 앵무새의 두 눈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두 개의 세계 속에 살아가면서 기억하고 싶은 말을 기억한 채 내내 반복하는 사람들이 소설 속에 가득한 것이다.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114쪽)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동시에 살아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한강은 말한다.


 (이미 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삶은 기억하는 삶이다. 다시 말해 세 인물은 현재의 삶과 기억하는 삶 사이를 헤매며 삶을 이어갔던 것이다. 인선의 어머니는 사월의 제주를 겪었고, “뺨에 내려앉은 눈이 이상하게 녹지 않는”(81쪽)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사월 제주의 시간 속에서 생사를 알 수 없던 오빠의 흔적을 뒤따라가는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흔적을 뒤따라가던 어머니의 삶을 인선은 경하에게 전한다. 이들 삶의 방식을 다시 말하면 잊을 수 없는 삶이다. 오월의 광주를 잊을 수 없는 나와 어머니를 잊을 수 없는 인선, 사월의 제주를 잊을 수 없는 어머니. 이들은 그 무엇도 잊지 못한 채 기억하고 살았다.


 더하여 한 사람의 기억을 다른 사람의 기억이 이어 받는다. 경하와 인선이 기획한 ‘통나무 심기’ 는 어머니의 기억과 연결됨으로써, 고립의 섬 속 “불길이 번졌던 자리“(244쪽)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작업이 된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수십 개의 통나무 조각들을 죽음의 땅으로 여겨지던 곳에 심음으로써 우리는 “조각난 거인의 몸처럼 겹겹이 포개져 누운 나무들 곁으로”(172쪽) 갈 수 있게 된다. 한 사람의 이야기의 구전은 번역 불가능한 내부(사월의 제주)로부터, 그 어떤 초월적 인류의 이념도 경유하지 않고, 다른 희생자, 다른 순교자, 다른 증인들에게로 열리는** ‘증언’ 의 성격을 가지게 되며, 증언을 들은 자는 자신의 방식으로 그것을 애도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전반에서 인물들이 애도를 행하고 있다면, 소설의 제목 ‘작별하지 않는다’는 사뭇 다시 보이게 된다. “제목이 뭐야?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거야?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192쪽)라고 이어지던 인물들의 대화는 제목의 의구심을 더한다. 애도의 관점에서 볼 때, 인선과 경하와 인선의 어머니는 모두 작별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작별을 위해 애도가 선행되어야 한다면(혹은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부재의 원인과 구성을 제대로 알 수 없는 현실 속의 세 인물은 제대로 애도(혹은 작별)조차 할 수 없는 삶을 이어왔고, 따라서 작별하지 않음은 어쩌면 작별할 수 없음으로 읽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작별할  없기에 삶과 함께 이어지는 작별은 성급하게 봉합해버린 우리의 상처를 계속해서 찌른다. 어쩌면 계속해서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 허나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40) 인선의 말처럼, 이어지는 작별을 말하는 한강을 통해 우리는 생채기  역사를 결국에는 이어 붙이고 다시금 이어진 손가락으로 상대의 손을 잡을  있을지도 모른다. 상처를 성급하게 봉합하지 않고, 흘러나오는 피를 억지로 멎게 하지 않고, 통증을 느끼며 그것의 존재를 기억하다가, 결국에는 양끝을 잇는 신경이 발달하여 손가락을 구부릴  있는 일련의 과정을  단어로 줄이면 애도가  것이다.


 예술가인 파울 클레Paul Klee는 “예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것” 이라고 말했다. 즉 예술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을 들고 있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세속적인 것을 불러일으키는 관계와 과정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우리의 인식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로 기억되길 바란다는 한강의 말로 인해, 나는 다시금 그/그녀가 만들어낸 지극한 관계와 과정으로 빨려들어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 오카 마리, 이재봉, 사이키 가쓰히로 역,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서울 : 현암사, 2016.

** 우카이 사토시, 박성관 역 「파울 첼란, 『칠흑같은 어둠에 싸여』」, 『저항에의 초대』, 서울 : 그린비, 2019.

*** 팀 잉골드, 『팀 잉골드의 인류학 강의』, 서울 : 프롬북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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