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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May 06. 2024

대천사의 집에 와버렸다

D+69 북쪽길 28일 차

✔️루트 : Vega de Sariego - Colloto (약 23km)

✔️걸은 시간 : 5시간 28분






옛날 옛적, 호주에 살 때 <시크릿>을 읽고 실제로 가능한지 시험해 본 적이 있다.


' 나는 돈을 줍는다… 나는 돈을 줍는다…‘


정말 신기하게 며칠 뒤 진짜 지폐를 주웠다. 걷다가 문득 10여 년 전 그 일이 생각이 났다. 글쎄, 지금의 나는 믿지도 안 믿지도 않는다. 다시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나는 돈을 줍는다… 줍는다…’


오늘 그 주문의 응답을 받았다. 걷다가 5유로 지폐를 주웠다.



오비에도 대성당을 제대로 구경하고 싶어서 오비에도에서 하루 쉬기로 했다. 오늘 시작한 마을부터 약 27km 거리였는데 평지만 이어져서 오늘은 오비에도까지 걷기로 했다. 10km 정도 걸으니 Pola de Siero라는 마을이 나왔다.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원래라면 보이는 아무 식당에 들어갔겠지만 Asturias 음식에 대한 기대치가 한껏 높아진 터라 처음으로 맛집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내가 휴대폰을 보고 헤매고 있으니 한 분이 순례길은 저쪽이라며 다가왔다. 나는 Menu del Dia를 찾고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졸은 레스토랑이 있다며 나와 함께 걸어줬다. 진짜 순례길은 카미노에인절 천국이다. 내가 잠깐이라도 멈추면 꼭 누군가가 다가와 길을 알려준다. 사진을 찍으려 멈춰도, 문자 보내려고 멈춰도 꼭 누군가가 다가온다. 그 마음이 감사해서 길을 잃었던 척하며 하던 일을 멈추고 순례길로 돌아가곤 한다.






밥을 먹고 다시 떠난 길에선 요즘에 빠진 ‘최준영 박사의 지구본 연구소’를 들으며 걸었다. 파나마 대한 내용이었다. 이 유튜브를 듣다 보면 세상에 내가 잘 모르는 나라도 참 많고 안 가본 곳이 정말 많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나의 세계는 많이 작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면 ‘오! 나 베트남 음식 정말 좋아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을 불편해할 자격이 없다. 



점점 해가 더 뜨거워지고 있다. 오늘도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걸었다. 걷다 보니 지쳐 카페에 앉아 쉬고 싶었는데 도착한 Meres라는 동네에는 큰 종합병원만 있고 근처에 카페가 없었다. 그래도 쉬다 가야 할 것 같아 종합병원 잔디에 우비를 깔아 누웠다. 배낭에 발을 올리니 발이 찌릿찌릿했다. 혈액순환이 되는 느낌이 들면서 노곤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7시 10분이었다. 흠… 오비에도까지 10km가 남았는데 알베르게 마감 시간 내 못 갈 수도 있겠다. 6시 마감이라고 쓰여 있어 패스했던 오비에도 전 마을의 알베르게에 전화나 해보기로 했다. 알베르게 주인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언제든 와도 된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저녁도 내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준비해 준다고 했다. 아, 대천사다.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걸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청년 남자와 중년 여성이 나를 반갑게 맞아줬다. 오늘은 나 혼자라고 했다. 이들은 아무것도 서두르지 않았다. 편안하게 대화를 하며 체크인을 했다. 고객이 아닌 손님을 맞듯이 대해줬다.



마음이 편한 데에는 집의 분위기도 한몫했다. 모든 공간이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둘은 모자지간이고 알베르게는 가정집이었다. 딸들이 해외에 살게 되면서 빈 방에 순례자들을 맞기 시작했다고 했다.



공간이 참 중요하구나 새삼 느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는 기능에 집중한 알베르게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각 공간의 디테일 하나하나에 사는 사람의 애정이 느껴졌다. 음식도 플레이팅이 정말 예뻤는데 엄마가 직접 만든 요리를 담아 주었다. 이 둘은 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일상적 대화를 하며 함께 해주었다. 알베르게라기보다는 친구네 집에 놀러 온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정말 편했다.




저녁을 먹은 후 아들이 정원을 구경시켜 주었다. 디저트로 나왔던 직접 키운 딸기를 포함한 많은 걸 키우고 있었다. 이들은 자연에 관심도 많고 친한 듯했는데 그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프리미티보에 오르기 전에 세탁을 제대로 한 번 하고 싶었다. 세탁한 옷을 건조기에 넣었다. 코인세탁소 마감 시간이 10분 밖에 안 남았기에 온도를 최고로 설정했다. 덕분에 모든 빨래가 빠르게 말랐지만 비닐이 섞인 것들이 한껏 쭈그려 들었다. 양말은 유아용 사이즈가 되었고 침낭에는 셔링이 잡혔다. 베이컨 침낭... 새로운 시작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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