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H 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긴오이 Dec 16. 2023

나는 솔로가 너무 재밌어요

H는 일어나자마자 tv부터 켰다. 대개 사람들은 커튼을 열어 아침을 맞는다는데 H는 tv를 켜서 아침을 여는 것이다. H는 어려서부터 'tv 너무 오래 보면 바보가 된다'라는 말을 꾸준히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tv가 번쩍 눈을 떠야 비로소 세상도 작동하는 듯했다.  LG 올레드 화면 속에는 오늘도 와이드한 사건과 뉴스와 가십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참, 부지런히들 사네. 그야말로 울트라한 세상이야'. H는 커피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세상이 망하지 않는 한 방송국도 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어디서든, 또 누군가는 오늘도 무궁무진한 방송거리를 물어올 테니까. H는 '자기 글도 tv 같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미처 다 돌리지 못하는 채널 수처럼 끊임없이 창작이 샘솟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H는 요즘 자기 글이 부쩍 재미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소재가 다양하지 못하고 통찰의 탐침도 깊지 못해서 영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하고 있다. H는 원래 고독을 즐기고 짝사랑이라면 누구보다 일가견 있는 사람이지만, 오직 자신의 글만큼은 모쏠에서 탈출시키고 싶었다. 글이 못생겼더라도 글이 가진 취향과 체스처로 독자들을 꾈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H는 초기엔 잖아 보이는 글들을 주로 썼. 점잖은 직업과 나이를 갖춘 사람이니까. 반듯하고 아름답고 때 묻지 않은 글들을 내어 읽는 이들의 마음이 정화되길 바랐다. 가뜩이나 속 시끄러운 세상에 자기까지 나서 속 시끄러운 일을 보태긴 싫었다. H는 글을 통해 자신의 선한 의지들만 엄선해 글로 적어 팔고 싶어 했다. 결과적으론 H도 책을 내고 싶은 사람이니까 자기가 가진 상념들 중에 제일 고결하고 품격 있는 것만 꺼내 팔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상품성이 되는 사과들만 골라 담아야 상도덕에 맞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H의 욕심과 착각에 불과했다. 어느 날 H는 자신의 글에서 낯선 계몽의 돛이 높이 펄럭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사상가가 아닌데 왜 이런 사상의 돛을 높이 올렸단 말인가' H는 화들짝 놀랐다. '누가 누굴 가르친다는 거야, 이러니 누가 내 거들떠나 보겠어' H는 반성했다. 그건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강박이 불러낸 빗나간 어조의 훈계들에 불과했다. 무신사 옷처럼 무표정하고 위도 아래도 모두 단색으로 차려입은 무개성이었다.


H는 정서를 유익하게 하는 글이 좋은 글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정제된 표현이나 예의 바른 궁서체 따위로 우선 그런 것들을 데려오려 했다. H는 '좆'이란 단어를 쓰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섹스'란 두 글자를 쓰는 데에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H는 좆이나 섹스를 쓰면 자기 글이 상스러워진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글을 쓰고 있는 자신도 위신이 깎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진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키보드 위로 그런 단어들을 치는 순간, 마치 사무실에서 야동을 보다 들킨 상사마냥 가슴이 철렁했다. H는 그게 부자연스러웠다. 그게 뭐길래 자신을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모름지기 작가라고 하면 그런 것쯤은 아무렇게나 때려 넣을 수 있는 자유분방함이 있어야 하지 않나. 돈과 섹스를 빼면 세상은 정말 쓸 게 없다. 아니 재미가 없다. 제아무리 사랑같은 숭고한 가치라도 실은 돈과 섹스로 뒤덮인 세상사의 한 챕터일뿐이다. 숭고하다고 해서 저 멀리 떨어진 안드로메다에 살고 있진 않은 것이다. H는 세상의 유희와 통속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무엇보다 H는 평소 누구보다 욕을 찰지게 잘 쓰면서 글쓰기에 있어서 만큼은 그런 바탕을 숨기려 했다는 것이 영 찜찜했다. 그것은 어쩐지 위선 같았다.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고, H는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걸 딱 부러지게 변명하지 못하고선 당분간 어떤 글도 쓸 맛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자기와 글을 일치시키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솔직하지 않은 글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런 글은 독자가 사랑하지 않는다. H는 뭔가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tv에서 '나는 솔로'가 방송되고 있었어. 난 언젠가부터 이 노골적인 짝짓기 연애 프로그램에 푹 빠져있었는데, 아마도 이런 류 포맷의 히트작인 채널A  '하트시그널' 시절부터였을 거야. 그러니까 그게 벌써 언제 적이야. 하트시그널이 시즌4까지 나왔으니까 아주 한참 전이지. 시사나 정치풍자를 좋아하는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취향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저항 없이 시청을 이어나갔지. 이런 류에는 꽤 재미있는 지점들이 있더라고. 그 왜 있잖아, 갑자기 몰입되는 지점. 그건 아주 예민하고 부드럽고 찰나적이어서 섬세한 감정선을 지닌 사람들의 시청 취향에 부합하는 면이 있어. 그 왜 파르르 하고 찌르르한 감정선의 교차를 관전하는 재미가 있단 말이지. '아빠는 뭘 그런 걸 보고 앉아있어'라는 딸애와 아내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난 굴복하지 않았지. 지금은 어떻냐고? '나는 솔로'가 시청률 히트를 기록하면서 지금은 아내가 나보다 더 챙겨보고 있어. 결국엔 내 안목이 틀리지 않은 거야.






H는 일단 시선을 바꾸기로 했다. 그것들이 주로 아픔이나 상처들에 관한 것들이라 H가 '이런 이야기밖에 할 게 없나' 싶어 삐딱하게 보았던 이혼 이야기, 퇴사 이야기들도 편견의 시선을 거두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내밀한 이야기를 모두 까발리면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나 싶었던 글들을 보며 H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솔직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렇게 글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일은 H로서는 불가능해 보였다. H는 다만 자기 글이 적당히 속되고, 적당히 진실되고, 때로 중립적이길 바랐다. 더도 말고 딱 tv 같았으면 했다. H는 왜 자기가 tv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다시 곰곰히 생각했다. 소파에 길게 누워 바라보는 tv에는 무념과 무상과 망각이 있어 좋다. 세상 무서운 게 시간이라지만 이 tv 앞에선 시간도 맥을 못 춘다. 시간을 죽일 수 있는 건 오직 tv 뿐이다. 킬링타임용이란 소개말이 왕왕 오가는 오늘날엔 여기저기서 시간이 죽어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예술도 진실도 심지어 죽음도 이기는 시간인데 오직 tv만큼은 시간 앞에 깨발랄하다. 집사람은 나와 싸우고도 몇 분만에 tv를 보며 웃는다. 예전 같으면 그런 모습이 H의 화를 더욱 돋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그런 것들이 H를 안심시킨다. 저런 건 정말 보기 드물게 터진 생웃음이니까. 상호 간 몰이해의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H는 자신의 삶이 불행하진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정도로만 자신의 글이 tv처럼 라이트 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념과 무상과 망각으로 시간을 죽일 수 있는 글이라니. 통속과 허영의 싸구려라 비웃음을 당해도 그 앞에서 해맑게 희석되는 우울이나 화를 보면서 H는 당분간 '나는 솔로' 같은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