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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별곡 Jun 21. 2023

<소설> 운명과 우연

2탄. 닮은꼴

여자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식상하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불신이 있었고 특히 남자들은 전부 바람을 피지만 걸리는 사람과 안 걸리는 사람으로 나뉜다고 믿었다.

불신이 깔린 연애관은 상처받을까 두려워 누군가를 길게 짝사랑하든지 아니면 썸을 타다가 끝이 나게 만들었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배고픈 사랑은 순정만화와 멜로드라마에 나오는 꽃미남 또는 여주에게 틱틱대지만 은근히 챙겨주는 츤데레 남주들로 메꿔졌다.


가상 연애를 하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20대가 끝이 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닥치는 대로 소개팅을 하겠다며 졸라댔다. 스펙은 상관이 없었고 얼굴 확인도 하지 않았다. 마구잡이식으로 하니 마음에 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외모가 조금 괜찮다 싶으면 목소리, 옷차림에서 정뚝떨이었다. 아니면 호구조사부터 시작해서 취미, 혈액형으로 이어지는 뻔하디 뻔한 지루한 대화로 흥미를 잃었다.


그랬던 여자가 지금 눈앞에 나타난 남자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이 붉어졌다.

'저 혀 짧은 발음들과 하이톤의 목소리가 왜 귀에 거슬리지 않는 거지? (평소에 아나운서의 정확한 발음과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이성이 이상형이었다) 멍게를 연상시키는 더러운 귤껍질의 피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니? 정신 차려 양아린!'


"누나는 눈 높고 기도 세다고 했쟤?" 뜬금없이 종수(수영의 연하 남자 친구)가 찬물을 끼얹는다.

"얘가 뭐래~ 내가 언제 그랬는데~ 나는 눈이 퇴화돼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두더지보다 낮고 기도 안 세다. 우영이 오빠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벌써 오빠라고 부르나? 빠른 거 아니가?" 수영이가 아린이의 다리를 툭 치며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는 눈빛을 보낸다. 그러나 여자는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실실 대는 남자의 눈웃음, 눈이 작아서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까만 눈망울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우영이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오빠 저 어디서 본 적 없어요? 왜 이렇게 낯이 익지."

"그래요. 오빠라고 하니까 나도 말 놓을게. 나는 처음 보는 대. ㅋㅋㅋ."

남자의 방정맞은 하이톤 웃음이 아이의 웃음처럼 해맑고 사랑스럽게 들린다.

"야~나도 어디서 많이 본 거 같다. 엄청 익숙한데. 어디서 봤지?” 수영이도 한마디 거든다.

"이 누나들이 와 이라노? 이 형이 개미핥기 닮아서 별명이 그 거긴 하다." 20대 초반이라 그런지 철딱서니 없는 종수가 6살이나 위인 형을 놀려대며 좋아한다.


건방진 직장 후배의 깐죽거림에 남자는 짜증이 올라올 법도 한데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다. '아 저 눈웃음 너무 좋아. 그런데 저렇게 눈웃음 잘 치는 남자는 바람둥이라던데. 사귈 때 여자 단속 잘해야겠다.' 만난 지 30분도 채 안 됐는데 아린이는 벌써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켜고 있다.

"오빠, 집이 어디세요? 저는 양정인데."

"나는 사직동에서 쭉 살았는데."

"아~ 가깝네. 오다가다 자주 만났나 보다."

그녀는 맞장구도 칠 수 없는 썰렁한 농담을 내뱉는다. 수영과 종수는 눈으로 욕을 하지만 아린이가 딱한지 그런 거 같다며 맞장구를 쳐준다. 억지로라도 남자와 접점을 찾고 싶다. 빨리 친해져서 그의 모든 걸 알고 싶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건가. 그런 사람들을 한없이 가볍다고 비웃었던 자신의 오만함이 부끄러워진다.


그때 수영이가 “아 맞네, 맞아!” 아린이의 등짝을 치면서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소리를 지른다.

"야~~ 너희 엄마랑 많이 닮았다. 그래서 낯이 익은 거 아니가? 어머니 아들이라고 해도 믿겠다."  

그녀의 한마디에 아린이는 흠칫 놀라며 머릿속으로 운명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다.


ㅡ다음 편에 계속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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