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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Jul 16. 2024

작은 것에 감동하며

천연염색

      

십여 년 정도 입은 재킷이 있다. 소재가 마(麻)로 시원하고 멋스러워 즐겨 입었는데, 색깔이 흰색이라 그럴까 약간 누리끼리하고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몇 군데 생겼다. 그래서 최근 몇 년 동안 꺼냈다 다시 걸어두기를 몇 번이나 하고 전혀 입지 못했다. 버리자니 아깝고 입자니 마땅하지 않았다. 계륵이었다. 


며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궁리하다 번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염색하면 어떨까 하는. 그렇다면 어떻게 무슨 색으로 할까 궁리하다 양파껍질 이용한 천연염색을 해보기로 했다. 인터넷 검색을 했다. 양파껍질 염색방법이 자세히 나와 있었다. 물론 다양하고 고운 염색물감을 쉽게 구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래 입은 옷이니 양파껍질을 활용하기로 했다. 


먼저 양파껍질을 모아야 하는 게 과제다. 많이 모을수록 염료를 많이 추출할 수 있다니, 최대한 모아야 한다. 음식 만들 때마다 껍질을 모으고 또 모았다. 기껏 모아 놓았더니 연유를 모르는 아들이 쓰레기인 줄 알고 싹 버리고 말았다. 양파껍질이 그렇게 귀할 수 없었다. 다시 또 모으기를 한 달 정도 했다. 제법 수북하게 모였다. 내 생애 이렇게 양파를 짧은 기간 내에 많이 먹은 적 있었던가. 


그렇게 모은 양파껍질에 물을 붓고 삶았다. 노르스름한 색깔이 우러났다. 아주 진한 색깔은 아니었다. 다시 더 삶아 소금을 한 스푼 넣고 끓인 후, 체에 걸렀다. 조금 더 진한 염료가 만들어졌다. 이제 염색에 들어가야 한다. 약간 설레고 긴장도 되었다. 혹시 물이 들지 않아 그나마 입을 수 있는 옷이 못 쓰게 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두근대는 마음을 다독거렸다. 그리고 빨아서 말린 흰색 재킷을 넣고 주물렀다.


물이 들기 시작했다. 옅은 살구색이다. 고상하다. 얼룩이나 누리끼리했던 부분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참 주무른 후 슬쩍 짜서 욕실 옷걸이에 널었다. 두세 시간 지나자 거의 말랐다. 다시 양파껍질 삶은 물에 담가 한 번 더 물을 들였다. 처음보다 더 진한 살구색이다. 아, 내가 얻고 싶은 색깔이다. 온 세상에 살구꽃향이 번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이런 맛에 천연염색을 하는 것 같다. 한 번 물들인 것과 두 번 물들인 것이 달랐다. 만족한 색깔을 얻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재킷을 옷걸이에 걸어 말렸다. 마를수록 은은한 살구색이 나타났다.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옷이 다 마를 동안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는지 모른다. 남은 양파껍질 물에 아이보리색 셔츠를 담갔더니, 옅은 카키색처럼 보이는 오묘한 색깔이 되었다. 흰색은 살구색이 되었는데, 조금이라도 색깔이 있는 건 예상치 못한 색이 되었다. 신기했다. 면으로 된 흰 손수건도 남은 염료에 담갔다. 


다 마른 재킷을 다림질했다. 다려놓으니 더 고운 빛으로 반짝거렸다. 만족, 대만족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옷이 만들어졌다. 계륵이 따로 없었는데 완전히 새 옷처럼 되었다. 별 것도 아닌 양파껍질에서 이렇게 고운 색깔을 얻는다는 게 감동적이었다. 솔직히 나는 작은 것에 감동을 잘하는 편이긴 하다. 그러니 순전히 주관적인 정서다. 염색해 다림질한 재킷을 다음날 출강할 때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망설일 필요 없이 살구색 재킷을 입었다. 아이보리색 마(麻) 바지와 잘 어울렸다. 여름에 시원하기론 마 소재만 한 것이 또 있을까. 가슬가슬한 옷감이 살갗에 닿을 때 상쾌했다. 초복이라는데 더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시원했다. 염색했을 적보다 색깔이 더 고상하고 은은해 보였다. 처음으로 해본 어설픈 천연염색, 대성공이다. 지금까지 쓰레기로 버렸던 양파껍질이 이렇게 소용된다는 게 놀라웠다. 


강의실에 들어서자 수강생들이 내 재킷에 집중하는 걸 느꼈다. “색깔이 어쩜 그리 예쁘죠?” 참다못한 사람이 물었다. 양파껍질로 염색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양파껍질로 염색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지만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란다. 모두 한 마디씩 찬사를 늘어놓는다. 덕분에 수업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이렇게 일상에서 일어난 사소한 소재로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날은, 권정생 선생의 <강아지똥>을 읽으며 깨닫고 감동했던 것처럼, 양파껍질에 감동한 날이었다. 이렇게 사소하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한 것들이, 예상치 못한 가치를 빚어낼 수 있다. 나는 이제 앞으로 더 작은 것에 감동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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