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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연 Jun 30. 2022

인용문 단장 (3)

이와 연관 지어서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정선의 문장이나 학문에 관한 것이다. 정선이 명산승경을 화폭에 담아 수없이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흥을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글씨로 적어 넣은 사례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세상의 어떤 일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밝힌 바 없어서 그의 생각, 사상, 철학, 느낌 등을 전혀 알 길이 없다. 그의 진경산수화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정선이 시문에 능하고 학문이 깊었던 인물로 간주하기 어렵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정선의 평생지기였던 조영석은 앞에 언급한 「겸재정동추애사」에서 정선이 "경학에 깊어서 중용과 대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말을 외우듯 꿰고 있었고 말년에는 주역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손수 간추려 적었다"고 밝혔고 위에 언급한 황윤석도 정선이 "주역과 중용에 정통했다"라고 자신의 문집인 『이재유고』에서 지적한 것으로 보아 그는 전형적인 사대부들처럼 사서삼경에 두루 통달하고 있었다고 믿어진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문을 남기지도 않았고 자신의 감흥이나 견해를 적지도 않았던 것은 그의 주변에 사천 이병연을 위시한 자신보다 훨씬 나은 시인묵객들이 수다하였고 또 성격이 그의 호대로 겸양의 덕이 있어서 문인들 앞에서 자신의 글솜씨를 드러내기를 꺼렸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선은 동서고금의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오직 그림으로만 말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 안휘준, 「겸재 정선과 그의 진경산수화,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회화의 4대가』(사회평론, 2019)




한 강연에서, 50살이 되도록 아무것도 발표한 것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전집을 발표하고 그걸로 전부인 한 사내가 있다면 멋지지 않을까, 라는 플로베르의 편지 문장을 인용하며, 김화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말 오늘날에는 더욱이 이건 멋질 것 같습니다. 글자를 배우는 즉시 저서를 내는 시대입니다. 남의 책을 조금씩 조금씩 편집해서 저서로 내놓는 시대입니다. 모든 독자의 저자화의 시대에 이런 말은 정말 이상하면서도 감동적입니다.'


적당한 수준만으로 만족하면서, 앞서 간 이들의 공로에 기생하면서, 그런 주제에 운이 좋아 어쩌다 성공이라도 하게 되면 어떻게든 작가연이라도 해볼까 기웃대던 나는 이 말을 듣고 속절없이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영근 것이 아니면 내놓지 않는 엄결성이 훌륭한 작가의 미덕임을 무겁게 느끼게 된다.


나에게 있어 작가의 엄결성을 알려 준 최초의 기억은 어릴 적 윤오영의 수필 선집의 한 대목을 읽었을 때였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해서 그의 글에서였는지 곁에 붙은 해설에서였는지도 헷갈린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그의 「달밤」이라는 짧디짧은 글을 배우면서 무청김치에 막걸리를 먹는 맛이 어떤지 알 길이 없어 옅게 애가 탔던 적도 있었는데 그때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으니 아마 그 직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대목의 내용은 중국의 어떤 전설적인 일화였다. 한 젊은이가 작가가 되기 위해 문장을 배우기 시작한다. 십 년인가 이십 년 동안 공부만 공부만 한 뒤 써먹지도 않고 내려놓는다. 먼젓번 것은 무슨무슨 문체였는데 이번에는 다른 또 무슨무슨 문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십 년인가 이십 년인가 또 공부만 공부만 하고 나서 또 내려놓는다. 그 짓을 너댓 번이나 한 뒤에야 그는 다 늙어서 작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윤오영 자신이 오십이 넘어서 작가가 된 것을 두고 한 이야기였을 테지만 그때의 나는 그 끔찍한 끈기에 기가 찰 지경이었다.


도대체 그 끈기는 어디에서 얻어지는 것일까 궁금했다. 위의 글을 읽고 그 동력이 어쩌면 겸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겸재의 겸은 어쩌면 겸양의 겸이었겠구나. 물론 위의 글의 다른 대목에서는 그도 저술을 남겼으리라는 정황이 언급되고 있지만, 하여간 그가 과시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을 것이라는 것은 적잖은 감동을 준다. 그의 겸양은 또 자신의 주변에 명망 높은 이들이 많았고 또 그들을 은근히 자신의 견줄 대상으로 인식한 데서 온 자기검열일지도 모른다. 반드시 큰 뜻을 품는 것이 중요하다기보다도 나날의 엄결성을 지키는 데에서 무심히 그런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나 또한 그렇게 살아야지 하면서도 유혹과 지루함을 떨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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